식사는 생의 존엄
식사는 단순히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섭취와 다르다. 식사는 하나의 형식이고 정서이고 시간이며 공간이다. 그것은 초라하고 아름답고 멋있고 따뜻한 마음의 일이다. 혼자의 식사나 모두의 식사, 내 몸의 영위를 위한 시간은 영양분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것, 인간이라는 존재와 존재의 영위를 위한 것이다. 존재의 영위를 위한 시간, 네가 가난하거나 비천하다고 해도 존엄을 잃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다.
허기와 애정은 늘 비례한다. 나는 무척 많이 먹는 친구 몇 명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신기할 정도로 많이 먹는다. 뷔페에서 쫓겨날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그녀는 결혼식장 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먹어치우는 양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뷔페의 남은 음식을 종류의 상관없이 먹어치웠다. 마치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에 등장하는 배고픈 천사 그 자체인 것 같았다. 그녀는 빼빼 말랐다. 키가 165를 넘어가지만 몸무게는 45킬로를 넘지 않는다. 어느 날은 그보다 더 가벼운 날도 있었다. 그녀는 나와 문예 창작과에서 많은 수업을 같이 들었다. 우리는『301 302』영화를 같이 봤다. 황신혜가 연기한 302호 여자는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 속의 단식가였다. 친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애정을 거부하는 302는 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 방은진이 연기한 301호 여자는 요리사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대신해 요리하며 먹는 대신 허기를 채운다. 남편에게 요리를 해 주는 것으로 허기를 채운다. 요리에 대한 집착이 애정을 넘어설 때까지.
그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말이 없었다. 나는 눈치를 봤다. 그녀는 늘 집에 가고 싶지 않아 했다. 군인 출신 아버지가 군림한 가부장적 가정이었던 집은 그녀에게 늘 '안전하지 못한 장소'였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녀는 소설실습수업에서 하루아침에 가시복어가 된 인물에 대해 썼다. 나는 눈치챘다. 그녀는 독을 품고 가시를 부풀린 복어다. 욕조의 민물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가시복어였다. 그녀의 소설 속, 가시복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졸지에 가시복어를 키우게 된 인물이 여러 가지 환경조성을 위해 분주했는데, 가시 복어의 먹이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을 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가시 복어'가 아름답다고 표현한 문장에 성을 냈다. '가시 복어가 어떻게 예쁠 수 있어? 그것부터 공감이 가지 않아.' 교수님의 말에 그녀는 양 볼을 한껏 부풀리며 성을 냈다. 가느다란 그녀 몸의 뼈가 날카롭게 서서 삿대질했다. 가시복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심미학을 증명하기 위해 한 시간 내내 싸웠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고 분식집에 갔다. 새빨간 떡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그녀는 기름에 튀긴 토스트와 야채튀김과 고구마튀김과 어묵국수를 먹다가 갑자기 롤케이크를 먹었고 콜라 두 캔과 핫도그를 먹었으며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숯불갈비를 먹으러 갔다. 나의 역할을 거기까지였다. 분식집에서 가시복어처럼 퉁퉁하게 불어난 떡을 한쪽으로 밀어주는 것.
가끔 나는 초라한 기분이 드는 식사를 할 때마다 그녀가 생각난다. 어느 가시복어의 위태로운 식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욕조 속에 다이알 비누만큼 밖에 되지 않던 작은 그녀의 체구.
그 무렵 나는 복에 겨운 식사를 자주 먹었다. 남산 중턱에 있던 이탈리아 식당이 자리를 옮겨간 곳이 마침 학교와 가까웠다. 요리사이자 사장님은 나를 무척 예뻐했다. 브레이크타임에 맞춰 찾아가면 사장님은 저녁 예약 주문을 미리 준비하고 자신과 직원 한 명, 제자 한 명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내 것까지 같이 만들어 주셨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은 그곳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역에서 내려 식당까지 가는 길목에 자리한 시장에서 가끔 제철과일이나 야채, 제철 생선 같은 것도 사들고 갔다. 사장님이 내어주는 식사는 간단한 것들이었다. 대파와 올리브유로만 만드는 대파 파스타, 달걀만 들어간 로마식 파스타, 간장으로만 간을 맞춘 떡볶이, 점심 장사에 남은 안티 페스토용 소스에 비빈 차가운 면요리나 가끔은 볶음밥을 내어주셨다. 나는 가끔 만원을 냈다. 그마저도 사장님은 잘 받지 않으셨다. 나는 가끔 그림을 그려 가게에 걸어두었고 가게 한편에 있는 피아노를 쳤고 학교에서 배운 재미있는 소설을 간추려 들려드렸다. 우리의 식사 시간은 2시간이 넘었다. 파스타 한 그릇, 떡볶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천천히 먹었다. 음식에 감탄하고 재료의 출처와 상태에 대해 토론하고 접시의 온도와 모양 빛깔에 대해서 늘 나누었다. 어제 저녁에 손님이 먹고 남긴 와인을 가끔 홀짝이고 코르코 마개에 벤 냄새를 맡으며 이탈리아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이미 많은 영양분을 써버렸지만 늘 배불렀다. 나는 내내 허기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나는 가끔 내가 누리는 이 축복을 그녀와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301호 여자는 남편이 자신의 음식을 잘 먹지 않자 남편이 사랑하는 강아지로 탕을 끓여 먹였고 302호 여자는 나중에 301호 여자에게 자신을 먹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301인지 302인지 헛갈린다고 고백했다. 포장마차에서 순대볶음 4인분 해치우고 마지막 남은 양념에 볶은밥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녀 안에는 301과 302가 살았고 그것은 또한 가시 복어였다. 그녀는 나의 권유에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식당이지만 일식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사장님은 가끔 생선요리를 했다. 하루는 나와 함께 식당 근처의 생선가게를 산책 나갔다. 복어를 파는 집 앞에서 우리는 복어껍질튀김을 먹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수조를 구경했다. 둥글고 투명한 수조에 가시 복어는 없었다. 왜인지 모를 조개껍데기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 조개껍데기를 작게 쪼그라든 가시복어라고 착각하고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 지금은 생사도 모른다. 단지 나는 식사와 애정의 관계를 몸소 증명하며 몸부림치던 그녀의 20대가 빨리 지나가고 좀 더 편한 식사를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 내가 풍족하고 만족스럽게 누렸던 식사가 언젠가 그녀의 생애도 존재하기를.
내 친구의 지인은 영국과 독일에서 살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군에 입대했다. 그가 가장 못 견뎌한 것은 언어나 강압적인 군기가 아니라 식사였다. 그는 금속 식판을 마주할 때마다 존엄성이 깎여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음식의 종류와 아침 점심 저녁 상관없이 공평하게 주어지는 미지근하게 살균된 식판. 하나의 판에 움푹한 공간이 있다고 모두 그릇은 아닌데 그곳에 밥과 국과 반찬과 국수와 후식과 과일과 김치 등이 한 번에 담겨 나오는 걸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식판에 먹으면 모든 음식에서 쇠맛이 나고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진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비싼 그릇을 형식 별로 구비해 놓고 산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슈퍼마켓에서 받은 증정용 컵도 십 년 넘게 사용했다. 하지만 그보다 식판에서 허겁지겁 먹는 식사가 그에겐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효율을 따져야 할 때와 존엄을 따져야 할 때를 구분했으면 했다.
식사란 존엄이야. 그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음식의 맛은 때론 멋에서 비롯된다. 대나무 바구니에 담긴 찐 감자와 주물에 담긴 것과 무명천에 담긴 것은 맛이 다르다. 그것은 화학작용이나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멋이 주는 맛이 있다. 또한 그것은 감자의 생에 대한 존엄이고 감자를 먹고 생을 영위하는 사람에 대한 존엄이다. 그리하여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는 어둑하고 겸허한 맛으로 짜고 쓰게 남는다. 가난한 치들의 존엄한 감자 한 알.
대만에서 엄마와 나는 우연히 차를 덖고 파는 가게에 들어갔다. 우리는 카페와 같은 찻집을 기대했지만 그곳은 제품이 진열된 곳이었다. 그러나 가게 한편에서 아르바이트생이 3개의 차를 시음할 수 있다며 우리를 앉혔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다상을 사이에 놓고 그는 철관음차는 철관음차에 맞는 잔에, 동방미인은 동방미인에 맞는 찻잔에, 아리산 우롱차는 그에 맞는 찻잔에 각각 내려 주었다. 우리는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마셨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다상에 찻잔이 아홉 개가 놓였다.
나는 시음했던 차 중 2개를 샀다. 우리 집에는 4개의 찻잔과 다구 종류가 있지만 그곳에서의 맛은 나지 않는다. 개완에 진하게 우려내 마시면서 그곳의 맛을 그리워한다.
차를 다루는 이들은 그런 섬세한 존엄을 지킬 줄 안다. 각각의 차와 성질과 성품에 맞는 멋을 찾아내는 존엄, 가장 빛깔과 맛을 잘 내주는 잔에 담아 마시는 이의 존엄을 드러내주는 멋.
허기와 애정은 비례한다. 나는 그 애정이 다름 아닌 영위를 위한 존엄이며 멋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나는 옹기에 들어가고 싶고 어느 때에는 백자에 들어가고 싶다. 어떤 글자는 작고 오목한 곳에 담고 싶고 어떤 말은 희고 두꺼운 잔에 담아 건네고 싶다. 그런 멋은 맛을 살린다.
식사는 무엇보다 멋에 관련된 일이다. 조금 맛은 없어도 재료에 대한 존엄을 간직하고 대하는 일이다. 때로 우리가 그 재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혼자 먹거나 여럿이 먹거나, 급하게 먹더라도 식사는 생의 존엄을 다루는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그것이 면포나 나무젓가락일지라도.
몇 달 전, 단골 카페가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에서 즐겨 마시던 음료의 잔을 중고로 사 왔다. 집에서 커피를 내리면 그 잔에 마신다. 커피의 종류는 다르지만 나는 비슷한 마음으로 마신다. 그러다 보니 커피의 맛이 꽤 훌륭하다. 엄마는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수프 그릇을 좋아한다. 인스턴트 음식이나 포장해 온 국물요리도 데워서 그 그릇에 담아 먹는다. 그런 식사들은 어느 때고 애정이 담겨 있어서 쉽게 허기가 지도록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는 그런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그릇과 식기구와 재료가 고맙다. 그들이 내 식사를 오늘도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는 그녀의 에이포 종이에 내가 그려 둔 가시복어를 떠올린다. 식사거리가 하나도 없이 씻는 곳에 담겨 한껏 몸을 부풀려도 양 손잡이가 있는 수프그릇에 담길 만큼 작은 체구의 가시복어.
애정 없는 걸신들린 식사 대신 한 그릇의 가시복어를, 언젠가는 그녀가 제대로 요리해 먹기를 바란다. 참, 독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