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차, 당신에게 떨어지는 가을은 무슨 맛인가.
우리는 한적하다 못해 적적한 속초의 구석진 숙소 사랑방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편안하게 틀고 낙엽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들지 않는 다섯 칸짜리 숙소는 쌀쌀맞은 정적이 흘렀다. 양지바른 쪽은 카페가 한창 영업을 하고 있다. 그는 아주 가끔만, 커피가 아닌 차茶를 찾는 손님의 부름에만 양지바른 곳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을 때면 그는 지금처럼 볕이 지는 쪽에 창이 난 방에 앉아서 적적한 투숙객에게 차를 내려 주었다.
그는 차茶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마주 앉은 나에게 가을차와 봄차에 대해 설명했다. 봄에 수확한 잎차는 싹에 농축된 영양성분이 많아서 싹이 어리고 맛이 부드럽다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가을 잎차는 여름 햇빛을 받고 억세 졌지만 영양을 이미 다 뺏겨서 맛은 익어 있어도 속을 덜 긁어냅니다. 때는 겨울 초입이었다. 그는 적막한 순간을 바꿔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가을차의 짙은 향이 흰 김으로 퍼졌다. 몸은 금방 훈훈해졌다.
유리창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흐리게 김이 서리기 시작한 계절에 둘러싸인 그는 마치 너무 익어서 떨어진 밤송이 같았다. 가시와 겉껍질이 메말라 바짝 쪼그라든 채 고요히 흙더미에 고개를 처박고 다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밤송이.
내일은 봄잎차를 드릴게요. 나는 하루면 떠날 투숙색이고 그는 이곳 붙박이장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도착한 이에게는 가을차를 떠나는 이에게는 봄잎차를 주는 그의 주름진 얼굴에 씁쓸한 그늘이 졌다.
가을 녘에 되면 그가 생각난다. 그는 밤 열 시에 화덕에 알밤과 고구마를 구워 방에 넣어주기도 했고 방문 앞에 자갈을 골라 비몽사몽 한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는 객들이 넘어지지 않게 새벽을 돌보기도 했다. 나에게 그가 정성껏 돌보던 하루의 숙박은 가을맛으로 기억된다. 가을에 그득한 수많은 음식들을 제치고, 하필이면, 적적한 가을잎차와 구운 알밤과 고구마 따위가 가을 맛으로 기억되다니.
바다에 떨어지는 가을은 전어를 토해내고 산에 떨어지는 가을은 붉은 과실을, 밭에 떨어지는 가을은 벼를 낸다. 당신에게 떨어지는 가을은 어떤 맛을 토해내는지. 속초 구석의 그에게 떨어진 그 해의 가을은 억세고 향이 짙은 대신 속을 덜 긁어내는 차였고, 그는 나에게 자기의 가을을 내주었다. 이따금씩 나는 나의 가을맛을 누구에게 어떻게 줄 수 있을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푸른 대추가 점점 주름을 내고 짙어질 때, 대추는 자기의 가을맛을 내게 준다. 홍시가 점점 익어 떫은맛을 단맛으로 바꿀 때, 감은 자기에게 온 가을을 맛으로 낸다. 배추는 속까지 단단하게 익어 가을의 맛이 겨울 김장으로 이어지도록 자기의 가을을 내어준다. 전복과 대하는 차가워지는 수온에 살을 찌우고 아직 단단한 겨울옷은 입지 않은 모습으로 자기의 가을을 통통하게 내어준다. 그들은 다들 자기의 가을을 맛으로 내어준다.
나에게 떨어진 가을은 어떤 맛을 내고 있나, 당신에게 떨어진 가을은 어떤 맛을 주고 있나. 커피만 마시며 살다가 쌀쌀해진 바람에 문득 그때의 가을맛을 떠올린다.
가을에는 차를 마시고 싶다. 비단 그때의 일 때문이 아니다. 각성을 요하는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때에 깨어있게 하는 맛보다는 살살 누그려 트리는 맛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섯 시도 전에 해가 떨어지고 붉어지지면 덥석 까만 가을이 내게 안긴다. 붉다가 검어지는 멋이 세피아로 번질 때, 쉽게 허기가 지는 법이다. 허기진 속을 긁지 않는 차를 마셔야 한다. 그러나 차에 대해서 진지하게 쓰지는 않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차가 아니라 가을의 맛이다.
그리고 가을의 맛은 기꺼이 자기의 가을을 내어주는 것들로 장식되어야 한다. 가을의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진 추희 자두가 끝물이다. 사과가 한창이다. 귤이 조금씩 나온다. 무와 배추가, 늙은 호박이 나온다. 대추가 익었다.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여러 가을이 자기의 맛을 던진다.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소진되어 쓸쓸해하는 당신을 위해 가을의 맛이 간다.
그가 구워서 방에 넣어 준 군고구마와 군밤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껍질이 적당히 탄, 검은 숯의 내음이 기억난다. 검은 숯은 까맣고 긴 밤이 다가올 겨울을 위해 예비된 난로였다. 나는 한 덩이의 군고구마를 이불 옆에 두고 곤한 밤을 보냈다. 아침까지 구수한 향은 거기에 남아 내 머리카락에 향을 남겼다.
다음날 그는 떠나는 나에게 봄잎차를 내려 주었다. 봄잎차는 가을 열매와 같아요. 그는 말했다. 수줍게 내민 두 알의 대추가 작은 그릇에 담겨 나왔다. 그 뒤로, 나는 이제 가을에 대추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그는 알까?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