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과 멋 | 김장철, 김치

by Ggoc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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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우리는 반드시 김치를 가득 채워놔야 한다. 김치의 빨강이 루돌프의 코를 물들여주지 않으면 한국의 크리스마스가 섭섭해질 것이다. 김장은 마치, 크리스마스와 추석 사이에 끼어 있는 민간의 신앙 같아서 배추를 절이고 고기를 한번 삶아 먹지 않으면 월동을 견딜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김장김치는 아무리 가난한 이라고 한 포기라도 들려 보내는 것이 미덕이지 않는가.


김치에 고춧가루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고 알려져 있다. 소금으로 염도를 감당하기 어려운 소금값이 비쌀 때, 고춧가루를 첨가해 염도를 맞춘 근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마치 소금을 첨가하면 단맛이 올라오듯이 소금에 매운맛을 첨가하면 짠맛이 올라간다고 한다.

나는 굵은소금 위에 뿌려지는 빨간 고춧가루의 심미가 너무나 좋다. 일 년간의 울음을 말린 결정 같은 소금으로 단단한 배추를 절여내어 맛이 들게 하는 것도 좋고 그 위에 가을 햇볕에 잘 말려 빻은 붉고 매콤한 마음을 버무리는 것도 좋다. 김장 김치는 모두를 놓치지 않고 나눠야만 하는 '정'의 현신이기 때문이다. 한스러운 짠맛과 뜨거운 심장의 맛이 부디 겨울 동안 푹 익어 추위를 날 힘을 주기를 바라는 온정이다.


우리 집은 꼭 가을부터 모셔놓은 늙은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남은 양념에 버무려 묻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이층 나무집은 자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우리는 얕게 올라온 둔턱 같은 마당 둘레의 흙을 파고 독을 묻었다. 가장 밑에는 큼직한 호박이 켜켜이 들어가 있었다. 단단한 단맛이 든 호박은 배추에서 푹 익어 흘러넘치는 붉은 즙을 받아먹고 가장 안쪽에서 쪽숨을 쉬며 겨울을 난다. 그러다 어느 날에 적당한 날이 되면 엄마는 호박을 꺼내 큰 솥에 넣고 찌개를 끓였다. 특별히 고기나 멸치를 넣지 않아도 호박김치로 끓인 김치찌개는 한겨울에 맛보는 별미였다. 가을의 호박과 겨울의 김치가 함께 발효된, 두 계절을 잇는 맛이다. 나는 아직도 모르는 호박김치를 꺼내기 적당한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코가 시리던 낭만이 마당에 하얀 눈으로 소복이 쌓인다.

우리는 그 집에서 얼마간 살다 떠났다. 작은 마당과 땅에 파묻은 김장독이 있던 그 집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다. 고재에 쇼와, 의 연호가 새겨진 그 집은 병든 장미넝쿨이 담장을 덮고 있었고 낡고 비좁았지만 다른 것보다 겨울의 맛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호박김치처럼 또 다른 독에는 섞박지가 익어갔다.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섞박지는 유난히 그 집의 흙 속에서 시원하고 톡 쏘는 맛으로 익었다.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그 집에서 두꺼운 이불을 벗어나는 심부름은 죽도록 싫었지만 김치를 가져오라는 심부름만큼은 거절한 적이 없다. 잠옷바람으로라도 나가 양푼에 한 포기 덜어 오던 김장 김치가 어느 정도 소진되면 드러나는 섞박지는, 아삭이고 시원하고 건조한 겨울날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유난한 김치였다. 그것은 국물 없는 동치미와 매한가지였다.

어디선가, 근대소설에서 언 무를 서리하는 시골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캐내지 않은 땅 속의 언 무를 캐내어 아삭아삭 씹어 먹는 시골 아이들의 이야기는 섞박지지의 맛으로 내게 대체되었다. 땅 속에서 서리에 뒤덮여 조용히 익어가는 큼직한 무들, 겨울의 갈증과 소화를 책임져 주던 짭조름한 맛.


김치만큼 지역색이 잘 드러나는 음식이 없다. 바닷가 지역에서는 해산물을 넣고 육지에서는 돼지고기를 켜켜이 쌓아 김치찌개용 김장을 하기도 한다. 고들빼기나 청각, 생강, 마늘, 파, 젓갈은 조금씩 그 양이 달라도 꼭 필요한 것은 배추다. 나는 배추를 무척 좋아해서 생으로 뜯어먹다 배탈이 곧잘 나기도 했다. 아직도 그 습관이 남아 있어서 컨디션이 떨어지면 생 배추나 배추가 들어간 요리를 찾곤 한다.

시작은 역시 김장철의 배추에 있다. 김장하는 날이면 된장을 한 숟갈 넣어 푹 끓인 돼지고기 수육에 무채와 덜 절여진 생배추를 곁들여 먹는 관습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때 가장 작은, 제일 안쪽의 배춧잎의 맛을 들였다. 그 배추는 아직 푸르지 않고 희고 노래서 아직 봄 같다. 병아리나 개나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고 야들야들한 속잎은 아직 작게 말려 있기도 했다. 가장 속에 있는 작고 여린 배추의 맛은 겨울을 보내고 난 뒤에 봄이 올 것이라는 예고 같기도 해서 그걸 먹지 않으면 다음 계절과 약속을 하지 않은 섭섭한 기분마저 든다.


아무리 그래도 김장은 고된 일이다. 일 년 농사만큼 고되고, 또 많이 할수록 맛이 깊어지는 이상한 요리다. 교회나 학교, 마을 회관, 친척들끼리 모두 모여해야만 특유의 맛이 오래도록 살아남는 요리이기도 하다. 김장의 미덕은 모두 함께 버무려지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온갖 재료를 버무리는 일은 늘 아버지 같은 힘 센 사람의 몫이었다. 이것저것이 다 섞여 풀죽이 된 붉은 양념에 팔꿈치까지 깊숙이 손을 짚어넣고 저어 잘 섞는 일은 여간해서는 힘든 일이다. 다라이에 가득한 붉은 양념을 있는 힘껏 저어 섞는 일이야말로 가장의 일이다.


김장은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이 집, 저 집, 김치들이 돌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최소 여섯 개의 각각 다른 김치가 있었다. 잘나지 않아도 자부심이 있었다. 또는 수육이나 굴 같은 곁들인 음식이 함께 오고 갔다. 김장은 개인의 요리가 아니라 전체 집단의 요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운 내를 씻기 위해 매생이국 따위를 끓이고 추위를 잊기 위해 고구마를 굽거나 쪄내며 김장철을 난다. 우리 집 김장이 끝나고, 냉장고 한편을 비워놓고 온정이 돌기를 기다리며 난다. 이 같은 정서는 핼러윈에 사탕을 얻으러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푸근하고 풍족하고 천한데서부터 높으신 곳에서 사는 이들에게까지 다 돌아가야만 끝나는 철이다.


인천의 애보박물관은 김장철이 되면 무를 뽑고 씻고 고춧가루를 준비한다. 박물관 전체가 김장의 한 철을 준비한다. 김장은 민속의 전시이고 또한 아직까지 이어지는 삶의 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독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나게 될 것이다. 김치의 빨간 심장을 매일 조금씩 뜯어먹으며 열을 올리면서.

그리고 나는 겨울을 나는 것보다 더 혹독했던 지난 세 계절, 봄과 여름과 가을의 수확인 소금과 고춧가루와 배추를 잘 섞은 모든 김치와 당신들에게, 굵은소금 결정 같은 눈이 내리고 그 위에 빨간 코끝과 시린 손끝으로 종종거리며 걸어간 당신들에게 맵고 시원한 맛을 누리며 뜨끈한 안방의 휴식을 누리기를 기원한다. 그럴 가치가 있다. 김장철을 보내고 김치를 들인 모든 세간은.





맛 과 멋 은 한 주 쉰 뒤에 시즌 2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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