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Life BGM 2 11화

LifeBGM | 안개를 헤치지 않는다

Eleni Karaindrou - Ulysses' Gaze

by Ggockdo





"안개 주의" 간판이 보인다. 춥지 않은 겨울의 안개는 축축하고 눅눅하다. A가 타야 할 버스는 16분 뒤에 도착한다. 그전까지는 무조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야 한다. A는 안개 같은 머릿속을 헤치며 도대체 왜 내려야 했던 전철역을 놓쳤는지 생각했다. 졸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영상이나 음악을 들으며 주의가 팔렸던 것도 아니었다. 전철은 한산했고 느렸다. 문은 느리게 열리고 닫혔다. 정신이 무척 몽롱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넋을 놓고 문이 닫히고 전철이 제 속도를 내기까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것은, 도대체 왜였을까? 산으로 올라가는 버스는 두 시간에 한 대가 있다. 그때 그 역에서 내려 히터가 켜진 정류장 부스에서 여유롭게 기다리면 탈 수 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치고 낯선 전철역에 내린 A는 잠깐동안 황망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행선마저 코앞에서 놓치고 만 다음에 남은 선택지는 전철로 왔던 길을 역주해 도보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적한 외곽의 전철을 정직해서 철로를 담은 지상의 긴 터널이 육안으로 보였다. A는 철로를 올려다보며 안개가 낀 철로 터널 아래의 지상길을 걸었다. 양 옆의 자전거 도로와 단층짜리 집, 점포들이 부지런히 늘어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 아래의 서늘한 느낌은 아무래도 안개 때문이다.

A는 몇 년 전, 같은 지역의 국도를 달리던 때를 떠올렸다. 안개 출몰지역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심한 안개는 처음이었다. 안개 때문에 차들은 시속 삼십십킬로로 기어가고 있었다. 빨간 깜빡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심한 안개였다. 안개가 많은 이 지역은 대체, 무엇을 그렇게 가리려고 하나. 죄 많은 동네로다.


시간이 빠듯하다. A는 걸음이 빨랐다. 충분히 걸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마음이 조급해졌다. 안개가 시간을 먹는 것인지, 걸음을 감추는 것인지, 희뿌연 시야는 무엇인가를 좀먹고 있었다. 시간은 오분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정류장은 보이지 않고 높은 철로터널다리와 그 아래 주차된 차들만이 납작 엎드려 사냥할 의지를 잃은 무기력한 야생동물들처럼 웅크리고 있다. 암, 이런 진한 안개에서는 야생의 감각도 사냥본능도 길을 잃는 법이다. A가 길과 의지를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산 위의 약속이 그리 내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A는 뛰기 시작했다. 교회 몇 개가 지나간다. 빨간 풍차 로고의 베이커리를 지나친다. 보세옷집과 껍데기집과 낙지요리 전문점이 지나간다. 하지만 안개는 지나가지도, 지나치지도 않는다. 안개는 계속 거기에 고여있다. 안개가 그 자리에 "있는" 그 모습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적당할까.

안개는 고여있다, 잠겨있다, 드리워있다, 가득 차 있다, 장막치고 있다. 모른다. 안개는 그냥 거기에 있다. A는 안개가 왜, 거기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안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안개는 헤쳐지지도 않고 갈라지지도 흩어지지도 않는다. 안개에 대한 기상학적, 과학적 의미는 여기서 정류장을 향해 달리는 A에 의해 숙청당한다. 그럴만한 것이다. 안개는 비밀리에 비밀을 지켜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거기에 발가벗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물러서지도 사라지지도 발설하지도 않는다.


까마귀가 한 마리 울었다. 검은 날개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안개 주의" 간판과 "한여름 물안개 지역"이라는 간판이 동시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여름엔 더운 시민을 위해 이 길에 물안개를 뿌린다는 현수막을 빠르게 읽으며 A가 내달린다. 검은 천가방이 뜀박질에 요동치며 흩날렸다. 까마귀 날갯짓같이 삐걱삐걱 댄다. 회색 코트 밑단이 흩날린다. 맞은편에서 뒷짐 진 할아버지가 빠르게 걸어온다. A는 가까스로 할아버지를 피한다. 안개는 갑자기 모든 것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다시 감춘다. A는 뒤를 돌아보았다. 뒷길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안개만 가득 차 있다. 다시 앞을 보고 달린다. 거기에도 있다. 안개는 헤쳐지지 않는다.


안개를 틈타서, 땀이 난다. A의 두꺼운 목폴라 아래는 이미 흠뻑 젖어있다. 그것이 안개의 끈질긴 구애인지 아니면 땀인지, 둘 다인지도 모른 채로 A는 안개를 숨 쉬며 달렸다. 폐가 조금 삐걱삐걱 댄다. A는 전철터널 아래를 여러 번 가로질렀다. 길은 없고 안개만 있어서 길을 찾으려면 직접 발로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공업사 간판의 빨간 글씨가 보이기까지 A는 숨을 헐떡이며 걸었다. 코트와 가방이 부딪혀 덜그럭거리며 눅눅하게 젖었다. 그 틈을 타서 편의점과 정지되어 있는 자전거 몇 개가 지나쳤다.


A는 고독과 침묵과 공허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안개를 틈타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오는 고요한 길목은 함부로 깨우면 안 된다. A는 시간을 확인했다. 2분이 남았고 버스의 매연 냄새가 났다. 갑자기 안개가 사라졌다. A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는 없다는 듯이 거기에는 안개만 있었다. 다시 앞을 보았다. 파란 뚜껑을 얹은 버스가 출발 1분 전의 기백으로 덜덜거린다. A는 뜀박질을 멈추고 걸었다. 버스는 문을 열었다. 산은 안개를 버리고 흰 눈으로 덮여있었다. 또는 허름한 낙엽의 넝마를 입고 있었다. 산길은 덜덜거렸다. 안개를 잔뜩 먹은 폐가 덜덜거리며 숨을 쉬었다. A는 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몇 채의 집이 듬성듬성 나있다. 그리고 하늘 아래서 산 꼭대기까지 안개가 내려오고 있었다. A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안개는 헤쳐지지 않는다. 헤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 속으로 들어가 숨거나 그 속에서 다시 나올 뿐.


Eleni Karaindrou - Ulysses' Gaze

Θεόδωρος Αγγελόπουλος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의 영화 <율리시스의 시선>의 삽입곡. 영화 말미에 안개를 틈타 도망치는 시민들의 장면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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