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T - Behind the Yashmark
모든 삶의 에피소드는 아무리 하찮거나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절대성을 경험할 계기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실재적 행복을 경험할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이상 순수한 선택 앞에 전제되는 개념이나 합리적인 법칙 없이 선택을 소환한다. 이때 선택이란 키에르 케고르에 따를 때 "선택을 윤리에 통하하는 의지의 세례"이다.
- 알랭 바디우 「행복의 형이상학」 중 -
「말의 모양」에서, 갑자기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말들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중 유난히 알기 어려운 모양을 가졌다. '기쁨'이나 '즐거움'처럼 직관적이고 톡 튀는 감각은 순간적으로 솟아오른다.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말들은 솟아오르는 순간과 장소만 예측할 수 없을 뿐, 생각보다 정확하고 순수한 정체를 가졌다.
하지만 '행복'은 그렇게 갑자기 튀어 오르지 않는다. 가끔 벅차오르는 몇몇 순간도 서서히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결코 갑자기, 치솟지 않는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함'을 찾아 떠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복'이라는 개념, 의미, 뜻... 그런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과연 어떻게 생겨먹었느냐는 것이다.
서서히 차오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기쁨과 달리 행복은 서서히 차오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뜻한 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욕조, 반대로 따뜻한 노천탕에 천천히 몸이 발끝부터 담가지는 것. 행복은 시간을 요구한다. 나는 시간에 들어간 것들이 좋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순간'이 들어가는 것들이 좋다. '순간'의 축적이 좋다고 말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순간은 엄밀히 말하자면 순식간이 아니다. 화산도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니고 씨앗도 갑자기 싹을 터트리는 게 아니다. 풍선도 갑자기 터지지 않는다. 압력, 축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쌓고 쌓이는 것이다. 순간은 모든 축적된 시간의 끄트머리다.
희망도 그런 식으로 축적된 시간의 끄트머리에 피는 꽃이다.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일주일 동안만 펴서 빨리 따야 하는 것. 그렇게 빨리 따야 하는 성질이 바로 '순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자. 순간은 시간의 끝에서 피는 꽃의 생애다. 그것은 순식간이나 갑자기가 아니고 한 계절이나 때로는 더 오래 준비하고 축적한 시간이 서서히 차올라 마침내 터트리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행복의 순간은 그런 축적의 결과다. 그래서 순간이라고는 하지만 일평생이라는 삶이 갖춰지지 않으면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행복의 순간은 따라서 실제로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일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우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과들, 평범한 축적들의 경험 없이는 절댓값을 가직 끄트머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왜 안 되겠는가? 스트레스나 짜증도 꼭 그런 식으로 평범한 일상에 차근차근 쌓이다 어느 날 폭발하곤 하는데.
행복의 순간은 그러므로 꽤 길고, 생각보다 여기저기에서 일어난다. 끄트머리가 하나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가지가 여럿이라면 꽃이 달릴 수 있는 끄트머리를 여러 개 가질 수 있다. 때문에 행복을 위해서는 여러 개의 가지와 끝까지 밀어낸 끄트머리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
일상을 끝까지 충실히 살아해는 것, 그런 식으로 '온전함'이 이룩된다.
온전한 행복의 순간은 천천히 밀어 올리는 시간과 긴 호흡의 음악을 찬찬히 쌓을 때 드러난다. 그런 것에서 느껴지는 마침내의 끄트머리를 느끼고 싶어서 조용하고 지루한 시간을 평범하게 살아낸다. 그것이 온전에 이르는 길이라서 클라이맥스는 꼭 결말 마지막에 터지고,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나 희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 선인장 하나는 오랫동안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 살아있다.
이를테면 평범한 실존, 곧 익명의 개별자는 엄숙한 철학자보다 나은 방식으로
절대성의 기회를 도래시킨다는 것이다.
- 알랭 바디우 「행복의 형이상학」 중 -
행복의 이르는 시간의 순간을 잘 느끼게 해 주는 Esbjörn Svensson Trio - Behind the Yashm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