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과 멋 | 서러운 은행 구이

무상의 간식은 여자아이에게

by Ggockdo

부엌을 관장하는 어머니, 헐머니들은 먹는 것으로 베풀 수 있는 만큼 먹는 것으로 사랑을 거둘 줄도 알고 기묘한 술수를 부릴 줄도 아는 법이다. 부엌에서 일어나는 음식 권력은 은밀하지만 크게 작용해서 은근한 결핍이나 파괴적인 욕구를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여성과 음식, 가정과 음식의 관계를 조명한 근대의 많은 작품들도 부엌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을지 모른다.

특히 입맛을 배워가며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음식의 권위, 부엌의 권력은 큰 영향력을 발휘해서 심리적인 알러지와 신체적인 알러지를 유발하기도 한다. 이제 부엌과 음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여성이거나 어머니만은 아니게 되었지만, 서러운 은행은 아직 내가 어릴 때의 이야기이다.


명절 음식은 어린아이에게 외가와 친가를 구분하게 만드는 음식 스타일, '식풍蝕風'이 깃들어 있다. 나에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음식 구분이 확실했는데, 외가는 할아버지가 주로 요리했고 친가는 할머니만 요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외가와 친가는 나에게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별과는 반대의 인식이 자리잡았다. 아버지의 원가족은 할머니의 음식으로 어머니의 원가족은 할아버지의 음식으로 만들어진 식풍은 아이에게 요리가 여성적이라는 고루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명절도 그랬다. 외가에서는 할아버지가 도맡아 요리했기 때문에 딱히 고단했던 기억이 없다. 가끔 명절 음식 재료를 사러 같이 기차길 따라 고개를 넘어 시장에 갔던 기억이나 시장에서 파는 후박엿의 맛, 할아버지가 이미 며칠 전에 만들어 놓은 이북식 만두를 끓이는 냄새 따위가 기억난다. 음식은 재료상태나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상에서 만났다.

친가는 달랐다. 시누이가 셋이던 엄마와 그의 딸인 나는 철이 들 무렵부터 고모의 시댁 명절 음식까지 도와야 했다. 친가는 시골도 아닌 도심이었지만 늘 명절에 놀러 온 나에게 간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줬다. 베란다에서 화분으로 키우던 알로에를 꺼내와 잎 하나를 쑹덩 자르고 끈적거리는 살을 발라 주거나 누룽지 튀긴 것을 주었다. 가끔 여섯 살 위의 사촌 언니가 늘 속이 덜 익은 도넛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직 학생인 언니는 위험천만하게 튄 기름에 화상을 입어가며 맛 없는 도넛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도 마찬가지로 오빠에게 밀린 간식 전쟁의 후방에서 동생들과 도넛을 만들어 먹은 것 같다. 남자아이들은 직접 돈을 주고 먹고 싶은 것을 사먹게 하고 여자아이들에게는 돈이 들어가지 않은 간식을 주었던 것이다. 나중에서야 언니의 도넛도 전을 부치고 남은 튀김가루와 밀가루로 만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모이면 할머니는 오빠들을 불러 꼭 삼천원, 오천원씩 쥐어주었다. 그리고 직접 수퍼마켓에 가서 먹고 싶은 과자를 골라오게 했다. 만약 미리 사다 놓은 맛있는 간식이 있으면 오빠들의 차지였다. 어쩌다 집안에 사탕같은 게 있어도 별로 맛이 없는 계피맛이나 이에 서걱거리는 설탕이 코팅된 싸구려 파인애플 맛 젤리 같은 것만 내 손에 떨어졌다. 그래도 그게 구운 은행보다는 나았다.


매년 가을이 되면 할머니는 길가에 나가 구린내가 나는 은행을 한 포대씩 주워 그걸 깠다. 추석 전후로 친가의 가을 냄새는 지독했다. 은행열매의 진물이 묻은 행주나 은행을 말리던 신문지에 베인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다 시간이 맞으면 거실에서 뺀지로 딱딱한 은행 껍질을 깨서 검은 비닐 봉지에 담았다. 그렇게 무상으로 얻은 은행은 명절 전후로 나의 간식이 되었다. 실컷 녹두전이나 갈비찜 등, 고모네 시댁 음식을 한 소쿠리 해 놓고 출출하다 하면 오빠는 과자를 사러 나간 선선한 오후에 나는 은행을 구웠다. 기름에 튀기듯 구운 은행을 한 웅큼 내놓고 이쑤시개에 꿰어 먹게 했다. 배가 한창 고플 때는 갓 구운 은행의 고소함이 꽤 매력적이라 주는대로 받아 먹었다. 그리고 꼭 몸살이나 배앓이를 하곤 했다.

은행은 약성과 독성이 있어 한꺼번에 일정량 이상 먹으면 탈이 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는 과연 몰랐는지 의문이다. 가끔 할아버지가 먹고 싶다고 하면 개수를 세어가며 예쁜 접시에 몇 알만 담아가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철마다 과자 대신 은행을 먹으며 탈이 났고 그 이후로 더이상 은행의 고소함보다 꼬린내를 더 강하게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삼게탕 안에 들어간 은행 단 한 알도 먹지 않고 남기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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