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색으로 물들다

by 주홍빛옥상

겨울의 문턱에서 찬바람이 콧잔등을 스친다.

움츠려 들기에는 아직 이른, 베이지빛 햇살이 따사로운 11월도 곧 떠날 채비를 한다.


가을길은 고운 한복 같다.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붉은 단풍잎, 울긋불긋한 플라타너스의 너른 잎사귀 위로 쏟아지는 가을볕이 너울거리다 부서진다.


한 해를 보내는 것은 사계절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봄을 잊은 겨울에도 나무는 새순을 틔울 준비를 하고, 땅 속에는 새싹이 움틀 채비를 한다.

봄을 알리는 건 바람도, 햇살도 아니다. 봄의 새순이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추위를 견딘 나무는 그렇게 봄의 기운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봄의 색채는 따사롭다.

겨우내 움츠린 마음을 일순간 녹여버리는 봄빛은 그렇게 조용히 겨울을 밀어낸다.

맹렬했던 겨울의 한기도 봄의 온기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온 세상을 뒤덮은 봄꽃의 향연과 활기찬 봄의 생명력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지난겨울을 잊는다. 늘 그랬듯이.


연둣빛 봄이 짙은 녹음의 여름으로 향하면, 세상은 곧 숲이 된다.

뜨거운 더위를 식혀주는 건 무성한 녹음의 그늘이다. 나무가 울창해질수록, 그 그늘은 더 넓고 큰 쉼터가 된다.

긴 여름의 열기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짙은 초록빛 때문이다.


우리 생의 길고 뜨거운 여름과 같은 시절도,

푸르른 빛이 있어 우리는 지날 수 있는 것이다.


긴 여름의 어느 날, 이마의 땀방울을 식혀줄 미적지근한 바람 한 점이 불어오면, 여름의 끝자락에 섰음을 안다.


그렇게 가을을 기쁘게 맞이하고, 한결 가벼워진 공기에 감사하며, 청아한 가을 하늘을 더 높이 더 오래 바라본다.

그 하늘 아래, 하루도 빠짐없이, 깊어지는 가을의 색채를 눈에 담고 가슴에 담는다.


한 해의 저무는 가을빛처럼 나도 곱게 저물어 가고 싶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실히, 곱게 물들어 간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고 생각한다.


기쁨은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빛처럼 잠시 머문다.

찬란한 봄도, 생기 가득한 여름과 곱디고운 가을도 그렇게 낙엽이 되어 떨어지면

남은 건 회색빛 겨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계절을 지나며 알고 있다.

아무리 차가운 겨울도 반드시 지나가고, 봄눈 녹듯 사라져 봄이 온다는 것을.


겨울은 봄의 가치를 일깨우는 계절임을 알고 있다.

지나온 계절의 색채는 한순간 사라지고, 세상의 소음은 잦아들어 그 자리에 고요가 찾아든다.


지나온 계절의 지워진 색채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빛이 되어 되살아난다.

봄의 연둣빛, 여름의 짙은 초록, 가을의 주황빛은 무채색 겨울을 지나는 우리 마음에 따스함을 남긴다.


무의미한 생은 없듯이

무의미한 계절은 없다.


다가올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의 여린 빛이 쏟아지면 차가운 길을 데워줄 것이다.

잎으로 가득했던 나뭇가지에 가려진 것들이,

비워진 가지 사이 그 틈으로 보이는 것들을 비로소 오래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은 그렇게, 봄여름가을 동안 아름답던 나무 대신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손을 잡게 하는 계절인 것이다.


잊혀간 누군가가 있다면 뒤돌아 바라볼 수 있는 용기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 이 가을의 고운 빛깔처럼 자리 잡기를 바란다.



일생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은 그렇게 계절과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하루하루 고운 색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