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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온 가족이 푹 빠져 지냈던 드라마가 있다. 바로 MBC의 '보고 또 보고'!
이 때는 너무나 즐겁게 보았던 드라마인데, 약 20년 후에는 내 고통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학교 생활과 직장 생활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직장 생활의 시작과 끝은 단연코 '보고'가 아닐까?
처음 보고서를 준비할 때의 설렘을 잊을 수 없고, 이후 무수한 보고들이 있었고 대다수는 무난했으나
간혹은 칭찬을 받을 수 있었고, 또 간혹은 '월급의 70%는 욕값이다'라는 직장 내 옛말에 공감케 했다.
첫 회사는 입사했을 때부터 간소화된 '한장 보고'가 표준 양식이었고, 엑셀 툴을 활용해 좌우 / 상하 간격을 맞추고 일사불란하게 숫자와 글을 정리하는 게 기본 방식이었다. 회사 로고가 들어간 하얀 결재판의 오른쪽에 한장 짜리 주 문서를 클립으로 맞추고, 왼쪽에는 여러 장의 각종 첨부 자료들을 다시 클립으로 정리한다.
사안에 따라, 오른쪽 문서의 윗칸에는 여러 빈 결재칸이 있고, 보통은 팀장님-실장님-본부장님-(간혹) 사장님의 순서로 사인을 받는다. 10년 전 기준으로도 전자결재가 이미 활성화 되어 있었지만, 중요한 대면 보고가 필요한 건들은 이와 같이 서류를 정리하여 앞에서 설명하고 결재를 받는 게 일반적이었고, 처음 입사 후 익숙해 지는데 가장 시간이 걸리고 힘들었던 과정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Excel에 이런 기능이 있었던가. 학교 다닐 때 나름 함수 기능부터 피벗 테이블이라는 고오급 기능에 대해서도 학습을 하였지만, 셀 칸을 세밀하게 맞춰서 문장의 시작과 끝을 맞추고 같은 표 안에서도 위/왼쪽은 선을 흐리게, 오른쪽/아래는 진하게 조정하고 셀 사이에 미세한 행과 열을 넣어 시각적 효과를 주는 건 빌 게이츠도 개발할 때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확신한다.
한글 프로그램에서 3~4장 단위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데 익숙했던 당시의 나에게 적절한 숫자, 표, 워딩의 조화로 한 장에, 그것도 적절한 여백의 미를 살려 표현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고, 그 한 장을 위해 며칠이 걸리곤 했다.
바로 위의 사수 선배에게 통과가 되어도, K 차장님의 시점에서는 고쳐야 할 부분들이 많았고, 여기를 넘어서도 다시 그 다음 관문을 넘기란...... 때로는 문서가 틀려서 다시 하기도 하였고, 문서는 맞아도 순간순간의 대응을 못 해 다시 하기도 하였다. 이토록 내 생각을 타인에게 강렬하게 관철시키고 싶은 때가 있었던가?
항상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 컬러풀한 정장과 넥타이로 사무실 분위기 메이커였던 P 선배는,
나에게 회사 생활 전반과 보고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 주었다.
파트장 K차장님은 인도네시아 근무 후 퇴직한 선배분들이 인도네시아 회사들의 임원 직급으로 가는 경우들도 있다면서, 당시 한국 기준으로 트레이닝된 사람들의 보고가 강력한 무기라는 얘기도 전해주셨다. "이렇게 딱딱 맞춰서 정리하는 것도 어려워요. 한국 회사 기준으로 정리하면 아주 다들 좋다고 한다는 거야!"
분명 한류 이전에 K-보고가 있었고, 이 업무에 큰 부담을 안 느끼게 된 건 첫 회사 기준으로 최소 5년은 지난 후였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왜 이렇게 문서 구성도 어렵고, 분명 준비한 말인데 다른 말이 나오는지.
생각지 못했던 질문에는 항상 식은 땀이 났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준비하였어도, 막상 윗 분에게 드리고 나면 '아차'하는 부분이 작든 크든 1~2개씩은 보고 과정에서 꼭 눈에 띄었다.
시간이 흐르고 고민과 시행착오가 쌓여감에 따라, 점차 주위로부터 받는 도움도 줄게 되었다. 혼자 완성이 가능해 지면서, 내가 일을 찾아서 때의 기쁨과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연습도 필요하지만, 다른 일반 업무에 익숙해져야 보고 준비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재무 직군은 절대적인 업무량이 있어서, 이 업무를 정확하면서도 빠르게 처리하는 스킬을 갈고 닦는 건 회사밥을 먹는 내내 고민하고 연습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세일즈와 의사소통의 어딘가에 있는 보고, 나는 아직도 항상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