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ce upon a time -
이른 출근, 때때로 이어지는 회식과 야근에도 어느덧 익숙해져 갔다. 신입사원이 비중있는 일을 하지
않는 건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소위 '몸 쓰는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입사 당시에는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10년전 결산을 할 때는 4~5명이 삼삼오오 모여서 커다란 전지를 펼치고 'T'자 크게 쫙 그리고, 차변 대변
숫자 하나씩 적어 나가는 게 시작이었어. 월말월초에는 며칠씩 밤을 새곤 했지.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직원도 많이 줄었어요. 그 때 5~10명이 하는 일을 지금 1명이 한다고 보면 돼. 나중에는 당신이 버튼
하나 누르면 되는 일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K차장님은 업무를 알려 주시는 사이사이, 저녁 회식때마다 본인이 해외에서 겪은 무용담과 예전 회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는데, 당시에는 무척 흥미로웠다. 지금 내가 겪는 일들이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당연한 것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미래에는 또 어떻게 바뀔까 막연한 상상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상상들 중 몇 가지는 현실이 되었다!)
다만, 고도화된 컴퓨터 시스템이 생겨 났음에도, 여전히 사람이 힘을 써야 하는 부분은 존재했다.
돌이켜보면 첫 회사의 전자결재 시스템은 당시 기준으로도 무척 잘 갖추어져 있었으나, 그럼에도 여러 보고 문서나 부속 자료들은 출력하는 경우가 흔했다. 몇 천명 규모의 회사에서 쌓여가는 자료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거기에 건설업의 특성상, 각 현장과 지사, 해외 법인에서 보내오는 자료들과 각종 증빙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이러한 자료들의 보관 용도로 우리 부서 전용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고, 입사 OJT때 방문한 이 곳은 지하 특유의 분위기에 오래된 종이와 먼지들이 쌓여, 특유의 퀘퀘한 냄새와 분위기로 항상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과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다.
다만 물리적 공간에 한계가 있는 만큼, 필요한 시기가 지났거나 의무적인 보관기한이 지난 자료들은 주기적으로 정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때로는 팀장님, 실장님까지 포함한 전 직원이 목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마대 자루에 종이를 가득 담아가며 정리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
나를 포함한 아래 연차의 직원들은 이보다 더 빈번하게 주기적으로 창고에 내려가 문서 분류가 맞게 되었는지, 필요한 증빙들이 잘 붙었는지 확인하고, 이제 버려야 할 자료들은 파쇄하고 마대로 정리하는 소위 '몸 쓰는 일'도 많이 하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원~대리급의 직원들은 크게 불만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끼리 편하게 얘기를 나누며 단순작업을 하는 이 시간은 오히려 이따금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이후 무척 친해져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P선배, Y선배 등을 포함한 다른 선배 직원분들과도 이 시간을 통해 대화를 좀 더 트게 되었다.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목장갑을 끼고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기다리며 선배들과 창고 여기저기를 누볐던 이 시간은 연차가 올라갈수록 줄어 들었고, OCR(광학 문자 인식), 전자 증빙 등이 도입된 지금은 K차장님이 들려 주셨던 과거의 과거처럼, 지금의 과거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무척 자주, 그 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