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스며들기까지
학교에서 일을 막 마치고 귀가하려는데 창밖으로 무섭게 비가 쏟아진다. 지나가는 비일 것 같아 잠시 그치질 기다렸다. 아직 하늘은 흐렸다. 다시 쏟아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는데, 계속 기다릴 수 없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맑은 하늘이 드러난다. 지나가는 비가 맞았다. 아직 도로는 젖어 있었지만 하늘이 파란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마주하니 괜스레 내 마음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거웠던 구름이 자신의 무게를 좀 덜어낸 것이겠지?
땅으로 쏟아진 빗물이 차차 깊은 곳으로 스며들고 있는 중이겠지?
나에게 필요한 건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구름이 자신의 무게를 덜어낼 만큼의 시간 그리고 덜어진 무게만큼의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갈 만큼의 시간이다. 무엇이 나를 무겁게 했었는지 굳이 분석할 필요가 없다. 어떤 새로운 다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 머리칼 너무 젖지 않을 만큼 처마 밑에서 잠시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 비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억지로 붙든다 해서 쏟아지지 않을 비도 아니고, 또 스며들지 않을 비도 아니다. 그 작은 물방울 하나 내 손으로 움켜쥘 수 없다. 다 빠져나갈 때까지 아주 잠시만 멈춰 선다.
너무 많은 생각에 몸까지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혼자서 너무 열심히 그 생각들을 먹었나 보다. 이런 무거워진 나에게 주고 싶은 건 다름 아닌 시간이다. 그냥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걸을 것이다. 그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으리라. 내 뒤를 살펴줄 주님께 다 맡기고 걸으리라. 언제 다시 비가 쏟아질지 알 수는 없다. 어디에서 비를 다시 피할 수 없을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뒤를 맡기고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아간다. 나는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 주님께서 내 뒤를 챙기며 나를 다독여주신다. 내가 내 앞길을 겁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일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몸 피할 곳 찾지 못한다면, 그냥 거기 멈춰 서서 나를 다 적셔낼 것이다. 언젠가는 그 빗물이 나를 다 지나 땅으로 쏟아질 것이고 또 그 깊은 데로 스며들터이니, 다 지나갈 일이다. 그러니 그 지나감을 나의 원의로써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