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때)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본 서쪽 하늘,
수채화처럼 붉게 번진 노을에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멈춰 선다
조금씩, 조금씩 길어진 그림자가
세상의 상처를 덮어주는 시간.
그렇게 하늘은 조용히 새로운 변화를 준비한다
어둑어둑해진 먼 산 너머로
태양의 붉은 옷자락이 사라지면
달은 비로소 은은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친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주는 듯한 저녁 하늘의 배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나의 또 다른 밤이 시작된다
"가장 눈부신 정오의 빛보다, 세상을 안아주듯 길게 늘어지는 해거름의 그림자가 우리를 더 깊이 위로한다."
하루를, 그리고 내 직업을 온전히 사랑하며 즐겁게 일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지금은 매일 무사히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지만, 젊은 시절의 저는 과연 그런 낭만을 알았을까요?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저는 행복보다는 '자아도취'에 취해 살았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하늘만 바라보며, 날아드는 돌멩이를 피하는 요령에 만족했고, 머리 위에 뜬 태양의 밝기만을 믿고 으스댔습니다.
그때가 아마 제 직장 생활의 정점이었을 겁니다.
"내가 하는 것이 정답이고,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해가 높이 떠 있을수록, 저에게서 파생되는 그림자는 가장 짧다는 사실을요.
그림자가 짧다는 건, 그만큼 남을 덮어주고 그늘을 만들어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로지 저 자신만 비추느라 주변을 돌아볼 줄 몰랐던 '정오의 오만함'이었습니다.
3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흡사 하루처럼 흘러갔습니다.
동틀 녘에 이 직종에 발을 디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했던 한낮의 태양을 지나, 이제는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하는 '해거름'의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신기하게도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제 그림자는 비로소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직위가 높아지고 가정에서의 책임감이 무거워질수록, 저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커졌습니다.
해가 질 때 그림자가 가장 길게 드리워져 세상을 덮어주듯, 이제야 비로소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빛은 저물 때 가장 긴 그림자를 남기듯, 사람의 진심은 그가 머물다 떠난 자리의 온기로 증명된다."
솔직히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저 스스로도, 그리고 저를 떠나보내는 동료들도 아쉬워하는 지금이, 박수 칠 때 떠나는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과연 잘해왔을까?" 하는 의문은 이제 접어두려 합니다.
그저 "충분히 잘해왔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주 오래는 아니더라도 몇 달간은 따뜻한 사람으로 동료들의 입에 회자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해가 완전히 지면 끝이 아니라, 달과 별이 뜨는 '밤'이 시작됩니다.
낮에만 일하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저의 뜨거웠던 낮 시간은 이제 정리하지만, 은은하게 빛날 인생의 밤을 위해 저는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맵니다.
태양은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올 때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내려놓음은 추락이 아니라 완성이다.
《김윤아 - Going Home》
[Gemini 활용 이미지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