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과 명성황후의 흔적... 건청궁 돌아보기
최초의 전기 발상지를 뒤로 하고 돌아보면 눈에 띄는 전각이 있습니다. 무언가 앞에서 보아 왔던 전각들과는 느낌이 좀 다른데요.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구조라서 그런지 양반집 같은 느낌도 들고, 자세히 보니 단청도 없네요?
이 전각은 바로 건청궁입니다. 향원정 바로 뒤 북쪽에 있는 건물로 궁궐 속의 또 다른 궁궐이라고 할 수 있죠. 건청궁은 고종 10년인 1873년, 고종의 내탕전(內帑錢)으로 건청궁을 지었다고 합니다. 내탕전은 왕의 개인적인 돈을 의미합니다. 건청궁은 1909년에 훼철되는데요. 일제는 1939년에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세웠고, 광복 후 그 건물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헐렸습니다. 2007년 10월 관문각을 제외한 건청궁 전각이 복원되어 공개되었죠.
장안당과 곤녕합 뒤에는 원래 근대식건물이 있었음습니다. 바로 관문각(觀文閣)이라는 2층짜리 건물인데요. 이곳은 왕의 신변보호를 위해 관계자들이 당직을 섰던 장소라고 전해집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일들이 많아지자 시위대를 만들었고 미국인 장군인 다이(Dye)를 비롯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러시아인 사바틴을 고용해 자신들을 지키게 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더 전해드릴게요!
건청궁은 침전인 곤녕합과 옥호루, 그리고 왕의 사랑채인 장안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딱 들어서면 아늑하고 소박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건청(乾淸)과 곤녕(坤寧)은 ‘하늘이 맑고 땅이 편안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걱정 없는 태평한 시대 즉 왕은 정치를 잘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경복궁에 왕과 왕비가 머무를 수 있는 다른 공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복궁 가장 뒤쪽에 왜 건청궁을 만들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후대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유는 정치적인 부분과 연관되어 있는데요.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것처럼 고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죠. 그래서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 10년간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대신 나라를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러다 고종이 점점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주도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마음도 커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하고자 하는 의지로 건청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또 한 편으로는 고종이 건청궁을 짓고 나서 바로 그해에 창덕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가 경복궁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고, 또다시 창덕궁으로 옮기는 일을 반복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건청궁이 왕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지은 건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아직 분분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렀던 곳이고, 특히 명성황후가 죽기 전까지는 왕과 왕비의 주요 거처였다는 것이죠.
고종과 명성황후, 흥선대원군이 존재했던 시기, 당시 조선은 개화냐 위정척사냐를 두고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최대의 격변기였죠.
고종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갈립니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영향력 아래 정치를 하게 되죠. 약 10년 뒤, 고종은 좀 더 독립적으로 정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지만, 흥선대원군이 쉽게 권력을 내주지 않았기에 갈등이 존재했다고 전해집니다.
고종만큼이나 회자되는 인물이 바로 고종의 부인이었던 명성황후가 아닐까 싶은데요. 조선 후기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긍정적인 시선과 부정적인 시선이 공존합니다.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죠. 명성황후라는 창작 뮤지컬이 나올 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 씨로,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는데요. 그녀의 아버지는 60세에 죽음. 당시 명성황후 나이가 8살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한 나라의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폄하하는 의도가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으로 보입니다.
시중에는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를 담은 책이나 연구자료들이 꽤 많은데요. 저 또한 명성황후가 어떤 사람이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습니다. 찾은 자료들을 토대로 여러분들께 간단히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명성황후를 두고,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은 대부분이 부정적이지만, 명성황후와 만났던 유럽 미국 등 서양인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남겼는데요. 미국의 선교사였던 앨런은 ‘냉정하고 침착한 비운의 왕비’로, 독일의 외교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는 ‘정치지향적 인물’로, 미국의 의사였던 언더우드는 ‘지적이고 사려 깊은 친절함을 가지고 있는 유능한 외교가’로, 영국의 지리학자였던 비숍은 ‘명민하고 이지적이지만 종교를 맹신’하는 모습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장영숙,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한국근현대사연구 겨울호 제35집, 2005)
이런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명성황후는 정치에 관심도 많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영리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병약한 아들 순종을 위해 무속에 빠져있다든지, 당시 어려웠던 조선의 재정상황이 비춰볼 때 문제가 있었다는 평가가 함께 맞물린다고 볼 수 있죠.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들은 주관적인 것이 많고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양쪽 면을 모두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건청궁에서 꼭 잊지 않고 짚어야 하는 안타까운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을미사변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사실 지금까지도 명성황후의 암살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사실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본이 고의적으로 이 사건을 계획했고 무모하게 실행했다는 것이죠.
당시의 국제정세와 조선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과거에는 청나라가 일본보다 우세에 있었지만,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본에 패했죠. 일본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때였습니다. 외교에서는 균형이 중요한 법인데요. 당시의 조선은 일본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미치는 것을 피해, 러시아 쪽에 힘을 실어주었죠. 조선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자 일본은 이러한 움직임의 배후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 일본 공사는 미우라 고로였습니다. 미우라는 외교관 등 일본인 고위공직자, 기자 등을 비롯하여 조선인들도 끌어들이며 명성황후 암살 계획 일명 ‘여우사냥’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은 그 시기, 훈련대와 시위대가 있었는데요. 앞에서 잠깐 언급했었죠? 훈련대는 일본인 교관에 의해 교육이나 훈련을 받았고, 수도와 궁궐을 지키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고종은 별도로 시위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시위대는 왕실 직속 근위부대로 미국 군인 출신인 다이 장군이 교관이 되어 시위대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1895년 8월 20일(음력) 새벽 5시경, 일본인들은 조선 훈련대를 대동하고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시위대가 궁궐을 지키고 있어 들어오는데 오래 걸릴 것 같았지만 너무나 손쉽게, 수월하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죠.
왜일까요?
일본에 붙어 경복궁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날 다이와 사바틴은 을미사변의 현장에 있었고, 사건을 목격했다고 하는데요. 서양인 목격자로서 그들은 살아남았고 을미사변의 상황을 알리게 되죠. 건청궁으로 온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찾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궁내부 대신이었던 이경직이 죽게 됩니다. 명성황후는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결국 옥호루에서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시신은 건청궁 동쪽의 녹산에서 불태워졌다고 전해집니다.
한 나라의 국모였던 명성황후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이 증거불충분 또는 무죄로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은 것은 더욱 분개할 만한 일인데요. 오히려 그들은 그 사건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더 잘 나갔다고 하니, 마음이 참 답답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명 ‘여우사냥’에 가담한 조선인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바로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 우범선은 친일파였는데요.
혹시 여러분,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해진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네. 바로 교과서에서 우리가 배웠던 우장춘 박사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바로 우범선입니다. 우범선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우장춘을 낳았는데요. 그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것에 대해 나중에도 죄의식을 느끼거나 후회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당시 친일파로서 일본에 망명한 사람들은 늘 암살위협에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우범선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렇지만 그는 결국 고영근이라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됩니다. 아버지 우범선과 아들 우장춘, 이 두 사람의 행보와 인생은 역사 속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극도로 신변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내이자 한 나라의 국모가 그렇게 처참히 죽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896년 2월 11일(양력) 새벽, 고종은 결국 궁녀의 교자를 타고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하죠. 이때 이용한 문이 바로 건춘문(建春門)이라고 합니다.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쪽 문으로 서쪽의 영추문이 주로 관리들이 이용했던 문이라면, 건춘문은 왕실의 종친이나 궁녀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춘생문 사건’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춘생문은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경복궁의 가장 북동쪽에 있었던 문이라고 합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전에 경복궁을 나오려고 했던 적이 있는데요. 춘생문을 통해 경복궁을 나오려고 계획을 실행하던 중 일부가 배신하여 실패로 돌아갔다고 하죠. 그 이후 다시 시도한 것이 바로 아관파천인 건데요. 러시아의 힘을 빌어 고종과 왕세자를 궁녀의 가마에 태워서 건춘문을 이용해 궁궐 밖으로 나온 거죠.
고종실록에 따르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뒤 얼마되지 않아 백성들에게 곧 대궐로 돌아가겠다고 알렸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신하들도 궁궐로 돌아오셔야 한다고 계속해서 요청했지만 고종은 결국 1년간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죠. 그리고 그 뒤에 돌아가겠다고 선택한 곳이 바로 경운궁(덕수궁)이 되었고, 그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경복궁은 더 이상 왕이 머물지 않는 공간으로 남게 됩니다.
건청궁에 얽힌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어 보았는데요. 특히 명성황후 암살 같은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이 경복궁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분들도 꽤 많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고난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경복궁, 그렇지만 아직 끝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남은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