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옥재 및 태원전 일대
건청궁을 나와 옆을 보니, 조금은 색다른 느낌의 전각이 보이네요.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 전각은 바로 집옥재입니다. 1876년 경복궁에는 큰 불이 나게 되는데, 고종은 창덕궁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가 1888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지내게 되죠. 그리고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集玉齋), 바닥이 온돌로 되어 있는 협길당(協吉堂)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옵니다. 이 전각들은 서재와 외국인 사신 접견소로 사용되기도 했죠.
집옥재는 양 옆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가 2층으로 되어있는데요. 일부는 복층으로, 나머지는 단층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옆의 팔우정(八隅亭)은 팔각형의 2층 정자인데요. 중국풍의 요소가 있어서인지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죠. 전체적으로 보면, 단청의 색깔도 화려하고요. 유리창이 있다는 것도 매우 특이한 점입니다. 지댓돌을 활용한 것도 눈에 띄고요. 집옥재를 잘 보시면 직선으로 이어진 용마루 양쪽 끝에 용 모양 취두를 단 것도 중국풍이고, 정전이 아닌 전각에 용이 그려져 있는 답도가 있는 것도 다른 전각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현판입니다. 지금까지 경복궁 내에서 봤던 전각들의 현판 글씨는 모두 가로였는데, 집옥재는 글씨가 세로로 쓰여있죠.
이렇게 경복궁의 북쪽으로 와 보니, 양반가옥의 느낌을 풍기는 건청궁에, 중국풍의 집옥재까지 경복궁의 전면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게 느껴지시죠?
참고로 집옥재와 팔우정은 개방되어 있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지난 궁중문화축전 때에는 팔우정에서 직접 책을 고른 후 앉아서 읽을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이 이목을 끌었는데요. 팔우정에 앉아 경복궁 풍경을 바라보며 책을 보는 사람들에게서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집니다. 고종도 그런 느낌을 갖고 이곳에서 책을 읽지는 않았을까요?
집옥재를 나선 후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경복궁의 서북쪽 맨 끝에 있는 태원전이 보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관심을 갖고 올라오는 관람객들이 많지는 않은 게 사실입니다. 경복궁 북쪽이기도 하고, 비교적 최근에 복원된 곳이기도 하거든요. 여기는 왕실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곳인데요. 선대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고종 때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위치 때문인지 전각의 의미 때문인지 다른 곳보다 유독 조용하고 한적한데요. 태원전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언가 경건하고 조용한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태원(泰元)은 하늘을 의미하는데요. 이곳은 왕실의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고, 빈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그 시신을 장례 때까지 보관하는 곳이죠. 대비인 신정왕후 조대비, 그리고 명성황후가 돌아가셨을 때 시신을 모셨던 빈소였습니다, 즉 빈전으로 사용된 거죠.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비 같은 왕실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면 우선 빈전에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 그러니까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왕릉에 시신과 관을 묻습니다. 그러고 나서 혼전(魂殿)에 신주를 모셔 정해진 장례 기간을 치른 후에 종묘로 신주를 모셔두는 자리인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되죠. 혼전은 국장을 치르고 나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은 나뭇조각인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여기서 3년 동안 모시고 난 뒤에 종묘로 옮기게 됩니다.
영사재, 공묵재 같이 태원전 주변에 있는 부속건물들은 모두 장례와 제사 등의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머물거나 음식 등을 준비하던 곳이었습니다
앞서 태원전 권역은 비교적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말씀드렸죠? 그 이유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총독부 관저가 들어서면서 태원전 권역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 터에 일본 군대가 들어왔고, 한때 박정희 정권 때 태원전 터에 수도방위사령부 제30 경비여단이 들어오면서 궁궐 안에 군인들이 머물렀죠. 1996년 군대가 철수하면서 복원 작업을 하게 되었고, 지금 여러분께서 보고 계신 태원전 영역이 새롭게 정비됩니다. 그래서인지 해설을 들으면서 많은 관람객들이 군부대 주둔에 대해 잘 알고 계시기도 하고, 흥미롭게 들어주시더라고요.
태원전은 왕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잠시 왕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게요!
여러분, 혹시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은 어느 정도였는지 알고 계신가요?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은 약 47세로 27명의 왕 중 환갑을 넘은 왕은 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 그럼 왕의 장례 절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죽은 왕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정태세~~~’, 바로 이 이름들은 모두 왕이 죽은 다음에 지어진 것인데요. 물론 살아생전에도 이름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었죠. 예를 들어 정조의 이름은 산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라마 이름 있잖아요. ‘이산’이라고... 이서진 배우와 한지민 배우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시죠? 일상생활에서 글을 쓸 때도 왕의 이름글자는 피했습니다. 피휘(避諱)라고도 하죠. 그래서 백성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을 줄이고자, 왕세자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한자를 쓰거나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서 지었습니다, 1글자로 말이죠.
죽은 왕이 받는 이름은 2개입니다. 하나는 중국 황제가 보내주는 시호(諡號)이고요. 또 하나는 묘호(廟號)입니다. 왕의 공덕에 따라 신하들이 논의하고 새로운 왕이 최종 결제를 하게 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나 ‘-종’으로 끝나는 것이 바로 묘호죠.
그렇다면 왕의 묘호에 조나 종을 붙이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원칙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공이 있는 왕에게는 조, 덕이 있으면 종을 붙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