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선당 및 동궁지역
* 전편 : 여기가 경복궁이었다고? 신무문&청와대 일대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었는데, 이번에는 왕실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왕세자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왕세자는 향후 현재 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이끌어 갈 존재였죠. 왕세자는 궁궐의 동쪽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 영역을 동궁(東宮)이라고도 했습니다. 왕세자도 동궁이라고 불렸고요.
우리가 생각하는 동쪽의 이미지는 어떤가요?
무언가 만물이 소생하고,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 동궁도 그런 느낌이 아닐까요?
동궁 영역은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 등으로 구성되는데요. 자선당은 왕세자, 세자빈이 생활하는 공간이고, 자선은 어진 성품을 기른다는 의미죠. 비현각은 세자가 집무를 보던 곳인데, 덕을 크게 밝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선당에 실제로 머물렀던 세자는 세종의 아들이었던 문종, 고종의 아들 순종 등이 있는데요. 우리가 앞서 왕의 일상이나 교육과 관련해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조선의 왕은 어린 시절부터 성군이 되기 위한 교육, 즉 왕이 갖추어야 할 지식이나 인품 등에 대해 꾸준히 교육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위를 계승하는 왕세자를 위한 교육 기관이 따로 있었는데요. 바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입니다. 춘방(春坊)이라고 불리기도 했죠. 보양청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보양청은 왕위계승자인 원자가 글을 배우기 전까지의 교육을 맡았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 강학청, 세자로 책봉되면 세자시강원에서 단계에 맞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네요. 경복궁 바로 옆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에 가시면 세자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을 보실 수가 있는데요. 여기서는 춘방과 보양청의 현판, 그리고 왕이 왕세자의 교육 기관에 내린 당부를 새긴 현판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지금의 자선당은 최근에 복원된 것인데요. 사실 자선당은 안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이 훼철되고 팔려나갔던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시죠?
자선당도 마찬가지였죠. 고종 25년(1888년)에 중건된 자선당은 1914년 일본인 오쿠라에 의해서 도쿄로 옮겨졌습니다. 자선당이 있던 곳에는 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고요. 오쿠라는 자선당의 건축 자재를 일본으로 가져가 ‘조선관’이라는 사설미술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옮겨진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건물이 소실되어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유구는 오쿠라 호텔 정원에 방치되었는데요. 그러다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내에 방치된 자선당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1995년 삼성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반환되죠. 그렇지만 환수된 자선당 유구는 돌이 불을 먹어 복원에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건청궁 옆 녹산에 따로 놓이게 됩니다. 이런 흐름을 모른다면, 지금의 동궁을 보는 관람객들은 ‘세자의 공간이 왜 이렇게 단출하고 휑하지?’하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께서 자선당 유구를 꼭 한 번 보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앞에 서면 참 많은 생각이 교차하거든요.
‘경복궁에 머물던 사람들은 도대체 화장실을 어떻게 이용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긴 적이 있으신가요? 해설을 하는 도중, 아이들이 제게 여러 차례 이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예전에 경복궁에 상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화장실이 있기는 한지 많이들 궁금해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었기에 경복궁에도 당연히 화장실도 있었습니다.
지난 2021년, 궁궐 사람들이 어떻게 생리현상을 해결했는지를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동쪽에서 대형 공중 화장실을 확인한 것인데요.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동궁 남쪽에서 화장실 유구와 특이한 정화시설을 발견했다고 밝혔는데요. 당시 기사들을 보면, 화장실로 추정되는 유적은 마치 성벽 같은 느낌으로 돌로 쌓은 모습이었고, 긴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바닥과 벽도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고, 돌 사이는 흙을 채워서 분뇨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이곳의 흙에서 기생충알이나 들깨씨앗 등이 나왔고 한 번에 최대 10여 명 정도까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식 정화조와 흡사한 정화시설을 이용했는데요. 찌꺼기는 바닥에 가라앉고, 분리된 더러운 물은 비교적 높게 만들어진 물이 나가는 출구를 통해 궁궐 밖으로 잘 나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화장실, 즉 뒷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동궁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곳에 뒷간을 복원했는데, 한 번쯤 그 외관을 보시는 것도 흥미로운 일 아닐까요?
그렇다면 왕도 이런 화장실을 이용했을까요?
여러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때 왕이 생리현상이 급하다고 할 때 상궁이나 내시들이 이것을 들고 오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바로 ‘매화틀’인데요. 왕은 화장실을 가는 대신 이 매화틀을 통해 급한 생리현상을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내의원에서는 매화틀에 담긴 분변의 색, 농도 등을 통해 왕의 건강을 확인했다고 하는데요. 원래 국가 최고권위자의 건강 상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잖아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거죠.
자, 그럼 이렇게 세자의 영역까지 둘러봤는데요. 어떠셨나요? 이렇게 궁궐 속 화장실 이야기까지 나누고 나니, 궁궐도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게 느껴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