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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희문자제독서성

어머니의 붓글씨 --- "喜聞子弟讀書聲"

by 김지민

2025년 5월 17일 >>>


우리 부모님께서는 1931년 신미(辛未)생 동갑이시다. 1956년에 결혼하셨고 아버님께서 2019년에 돌아가셨으니, 63년을 같이 사셨다. (어머니께서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두 분은 소학교 동기이기도 하시니, 1938년 입학부터 치면 무려 81년을 함께하셨다. 주산대회마다 늘 나란히 남녀 학교대표로 출전하셨다 하니, 어릴 적부터 실제로 "동고동락"하셨던 것이다. 역사는 우연이 없는 법. 한 분도 아니고 두 분께 공히 잠재했던 이런 수학적 재능은 마침내 2012년 “브릴리언트(brilliant.org)”를 탄생시킨다. 그 옛날 그 조막손에 들렸던 수판(數板)이, 먼 훗날 손녀 수연이에 의해 세계최고의 수학/과학 사이트로 신비로운 탈바꿈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진진한 비사(秘史)는 좀 더 먼 옛날로 거슬러올라간다.


약 100년 전, 울산의 꽃다운 십대 처녀 최차순과 박차선은 의자매 가약(佳約)을 맺는다. 각각 손목 안쪽에 먹물로 새겨 넣은 작은 점 하나가 그 징표.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서로 사돈 맺자는 약속도 한다. 두 살 위인 최차순이 먼저 결혼하여 3남3녀를 두지만 맨 위 아들을 6.25 전쟁으로 잃는다. 박차선도 스무 살에 결혼하여 5남2녀를 얻는다. 최차순의 남은 5남매 중 맏이가 우리 어머니, 박차선의 7남매 중 맏이가 우리 아버지다. 30년 언니-동생 하던 의자매(義姊妹)가 1956년, 마침내 사돈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 얘기는 대학교 1학년 때 외할머니께서 해 주셨다. 긴 세월에 약간 번지고 바랜 듯한 “검은 점”도 소매를 걷어 보여 주셨다. 이 귀한 스토리가 행여 묻혀 버릴까, 잊기 전에 글로 남긴다.


뿌리를 알고, 궁극적으로 그 뿌리의 뿌리이신 창조주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 자손들을 위해 여기 “뿌리”를 좀 더 캐어 남긴다. 외할머니께선 그 뒤로 9년을 더 사셨다. 나는 국민학교 첫 1년 반을 혼자 외할머니 손에 자라기도 했었다. 말수는 적어도, 속정이 깊고 음식 솜씨가 이 세상 최고인 분이셨다. 친할머니께서는 거기서 또 11년을 더 사셨다. 너무 늙었으니 속히 데려가 주십사 늘 기도하시던 중, 아침 드시고 잠시 누우신 결에 돌아가셨다. 평생 내게 “예수 믿어라” 당부하셨던 할머니. 나도 그렇게 예감하며 살았고, 결국 그렇게 됐다. 두 분 할아버지는 다 일찍 돌아가셔서, 사진만 보고 말씀만 전해 들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미남(美男)에다 약주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친할아버지께서는 울산이 알아주는 거인(巨人)으로 금은방(金銀房)을 하셨는데, 40대 후반에 중풍으로 누우셨다고 들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가난으로 공부는커녕 일찍부터 가장(家長) 노릇을 하셨어야 했다. 아버님께서는 6.25 전쟁 참전 후 22세에 9급 공무원으로 출발, 추후 직장 내 승진고시에 합격, 사무관으로 오래 일하시다 정년퇴직하셨다.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사자격시험에 합격, 15세부터 초등학교 교사를 십수 년 하셨다. 우리 3남매가 학교를 다니면서는 학부형들의 “육성회(育成會)” 회장을 가는 곳마다 하셨다. (그 리더쉽을 수연이가 물려받았다고 아내는 늘 말한다.) 형제자매간 깊은 우애, 넓고 돈독한 교우관계, 타고난 친화력/지도력, 한없는 긍휼과 자애심...... 두 분은 어딜 가나 최고의 리더이셨고, 이웃간에 든든한 기둥이셨고, 어느 모임에서나 “빠져선 안 되는” 멤버이셨고, 어느 면으로나 만인의 귀감이 되셨다. 그 달에 계모임이 20일도 더 표시된 달력을 본 기억도 있다. 누가 봐도 두 분은 참으로 멋지고 행복한 생을 누리셨다.


아버지께서는 뛰어난 음악성과 유머센스로 평생을 술과 친구와 음악 속에 사셨다. 노래 솜씨 또한 거의 가수 수준이셨다. 71세에 중풍이 오고 나서는 차남(次男)의 인도로 어머니와 함께 교회도 다니시고 세례도 받으셨다. 어머니께서는 매사에 철두철미하셨고, 수학에 아울러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셨다. 한글과 한자 둘 다 필체도 아주 수려하셨는데, 언제 익히셨는지 서예(書藝)에서 또한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셨다.


“喜聞子弟讀書聲(희문자제독서성)”


자식의 책 읽는 소리만큼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또 있으랴? 어머니께서 쓰신 이 붓글씨는 내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 걸려 있었다. 며칠 전, 이 액자를 시카고의 딸/사위네 집에 정식으로 물려주었다. 저희가 창업하여 경영하고 있는 “브릴리언트(brilliant.org)”는 바로 “공부”하는 사이트! 더없이 적절한 젊은이들 손으로, 우리집의 최고 소중한 유산이 한 대(代)를 더 내려간 것이다.


뿌리를 아는 자는 자세가 겸손하여 그 가는 길이 평탄하다. “내”가 잘났다 하면 반드시 그 교만에 무너진다. 우리는 모두 선조들에게서 --- 더 멀리는 만물의 근원이신 창조자로부터 --- 물려받은 재능을 갈고 닦아 세상에 전하는 중간자(中間者). 100년 전 대한민국 울산에서 떨어진 사랑의 먹물 두 방울이, 딸과 사위와 또 나를 포함한 전 직원의 피나는 노력을 거쳐, 전세계 방방곡곡 수천만 수학/과학도들에게 흡족한 지혜의 단비로 철철 쏟아져 넘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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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붓글씨 --- "희문자제독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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