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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우스운 아내, 무서운 아내

by 김지민

2025년 8월 17일 >>>


새벽 전화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전화벨에 희소식이 담겼을 확률은 0.1%. 이때 최상의 시나리오는, 모르는 사람한테서 “잘못” 걸려 온 전화. 잠시 놀라긴 하겠지만 “휴!” 하고 다시 자면 끝이다. 2005년 구정 때 나도 새벽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기러기 아빠 시절, 명절이라 부산 본가에 며칠 내려가 있던 중이었다. 옆방의 부모님 깨실까 봐 화들짝 핸드폰을 집어서 보니, 잘 아는 사람한테서 “맞게” 걸려 온 전화였다. 확률 99.9%의 가슴 철렁한 소식? 아니면 0.1%의 예외? 그 자세한 스토리는 이러하다.


우린 1983년 5월 5일 대학생 친선 고스톱 대회에서 만나, 1985년 9월 14일에 결혼했다. 아내는 내가 젬병인 “미술”을 전공했고, 의지가 남달리 강한 데다, 또 같은 부산이라 정서가 통해 좋았다. 결혼 전에 몇 달, 아내가 다소 “억울하게” 우리 부모님의 반대를 겪었던 이유는 딱 하나. 내가 상대적으로 공부를 좀 잘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고, 내가 밀어붙여 혼인은 큰 차질 없이 성사됐다. 매사에 철두철미하셨던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아내가 임신하자 이르셨다.

“자식 재주는 절대 모계(母系)데이.”

나중에 일 다 벌어지고 얘기하면 채신없어 뵐까 봐, 성격 그대로 아주 미리미리 단도리 하신 것. 애 낳아서 공부 못하면 100% 외가 쪽 책임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었다. 당신 아들보다 손주가 공부를 더 잘 하기는 불가능하리라 확신하셨던 게 분명하다.


완벽주의자, 우리 어머니. 하하, 어쩌다 그런 자충수를 두셨을까? 그럼, 아이가 총명해도, 우리 쪽은 아무 내세울 게 없지 않은가? 아무튼 손녀 수연이가 태어나 자라며 점점 재주를 보이자 어머니께서 아내에게 말씀하셨다. 브릴리언트(brilliant.org) 탄생 무려 20년 전의 일이다.

“내 아~ 너무 아~ 다 합치 가~ 너거 수연이가 제일 똑똑하다.”

내 아이 남의 아이 다 합쳐 가지고 --- 나, 누나, 동생, 세상 모든 아이 포함 --- 수연이가 최고라는 것. 비록 그 공(功)이 소롯이 “외가”로 돌아갈지언정,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신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교사자격시험에 합격, 일찍이 15세부터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던 우리 어머니. 정말 대단한 통찰력이셨다. 내 사업이 망하고 가세가 기울자 휴학하고 팔을 걷어붙인 김수연(Sue Khim). 무일푼에서 브릴리언트(brilliant.org)를 창업, 10년 만에 유니콘(unicorn) 기업의 대열에 올림으로 할머니의 혜안을 증명했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아내. 딸만으로는 아직 50%라고 생각했을까? 내게는 그런 에피소드들에 대해 일체 함구했다. 다 뒤늦게 얘기했다. 돌이켜보면, 아내는 남은 50%를 채우려 아들에게 전력투구했다. 누나와 달리 이놈은 공부에 전혀 취미가 없었기에 더더욱 애가 탔으리라. 미국은 초등 5년, 중 3년, 고 4년의 학제.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고, 아내는 아들 중학교를 뉴저지 주(洲)의 “공립 명문”인 밀번(Millburn)에 보내고자 그 학군으로 이사까지 했다. 게다가 졸업하면 고등학교는 “사립 명문”, 소위 프렙스쿨(prep school)에 4년 보낼 작정이었다. 밀번에 남으면 학비도 공짜고 그냥 자동 올라가는데, 그 평탄한 길을 마다했던 것이다. 엄마를 닮아 “미술”에 재능이 특출했던 아들. 그런 놈을 “공부시키는” 사립고로 보내 장차 하버드/예일/MIT 같은 명문대로 진학시킬 계획인 것이었다. 자식 재주의 “모계(母系)” 논쟁에 영원히 쐐기를 박고야 말리라, 하하, 굳게 입술 깨물었으리라.


나는 자식들이 어떻게 되는지 하나도 몰랐다. 내 갈 길이 바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이 모든 얘기 또한 나중에 다 들었지만...... 중학교 때 도근이는 등교 전 30분을 화장실에서 보냈다. 매일 무스(mousse)를 반 통씩 써 가며 닭벼슬 머리를 올리고 멋을 부리기 위해서였다. 하루는 지 엄마가 말했다.

“도근아, 머리카락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자 도근이 왈,

“엄마, 머리카락도 중요해요.”

생각해 보니 출장 가서 내가 직접 겪은 일도 하나 있다. 아내 말이, 수연이 책꽂이 맨 윗 칸에 책이 몽땅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때 수연이는 한국에 있었고, 도근이 말고는 손댈 사람이 없었다. 이제야 얘가 정신을 차렸다, 누나 책까지 가져가서 본다, 하며 우리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그 없어진 책들이 아무리 봐도 지 책상 위에 없어서 도근이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

“방에서 푸쉬업(push-up) 할 때 등에 무거운 게 필요해서 전부 여기 배낭에 넣어 놨어요.”


이런 아이가 “공부”를 하겠는가? 그러나 아내의 비젼은 확고했고, 도근이가 중3, 드디어 SSAT 볼 때가 됐다. 사립고 입학에 필요한 학력고사다. 누나의 도움을 받아 일단 모의고사를 한번 보게 했더니, 하하, 100점 만점에 30점. 아내는 기겁을 하고 누나를 정식 과외선생으로 붙였고, 두어 달 뒤 받은 실제 점수는 83점. SSAT를 99점, 100점 받고도 주르르 떨어지는 미국 동부 명문 사립고들. 거기다 원서 마감이 임박해, 시험을 한 번 더 쳐 볼 수도 없는 상황. 바로 여기서 “모계(母系)”의 저력이 나온다. 친가 쪽 “피”로는 시도조차 안 했을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그러나 서울대 가려고 3수까지 했던 --- 혹여나 4수 할까 봐 장인께서 입시일 새벽 상경(上京), 이화여대로 강제 동행하셨던 --- 아내에게는 원래 “불가능”이 없었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운동선수, 기부금 많이 낸 갑부의 자녀 아니면 83점은 원서를 안 넣는 것이 상식. 하지만 상식이 마음에 안 들면 “새로운 상식”을 창조하는 그녀. 결국 아내는 미국 탑텐(top-10) 프렙스쿨 중 여섯 학교에 원서를 냈다.


나는 그런 학교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로튼(Groton), 쵸트(Choate), 호치키스(Hotchkiss), 세인트폴즈(St. Paul's), 디어필드(Deerfield), 밀턴(Milton). 물론 이런 학교들의 선택 및 일체의 원서작성은 수연이가 적극 도왔다. SSAT 점수도 그렇고, 학교성적도 그저 그런 데다, 다른 특별활동도 전무하고...... 눈 닦고 봐도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이력. 그러나 그런 걸 개의치 않는 아내. 그녀는 도근이의 미술 포트폴리오도 제출 서류에 함께 넣어 보내게 했다. 항상 “된다”고 믿고 최선을 다하는, 그녀만의 “사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지원자들이 원서를 다 내고 나면, 학생 본인뿐 아니라 가능하면 부모형제까지 인터뷰하는 것이 미국 학교들의 관행. 그래서 아내는 내가 며칠만 미국 다녀갈 것을 부탁했고, 나는 급히 뉴저지로 날아갔다. 도착해서 얘기를 쭉 들어 보니, 참 기가 막혔다. 요행을 바라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건 완전 시간/정력 낭비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안 했다. 돈 버는 것 외엔 기여한 바가 없었던 나. 애써 준비한 세 사람의 사기(士氣)를 고려, 꾹꾹 본심을 감추었다.


2박3일의 여정은 세심하게 짜여 있었다. 첫 날 두 학교, 다음 날 세 학교, 셋째 날 밀턴(Milton) 인터뷰를 끝으로 뉴저지 집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내 평생 누구를 부러워해 본 일이 없었는데, 그때 사흘은 예외였다. 학교마다 차를 세우고 인터뷰 장소로 걸어가다 보면,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는 그 학교 재학생들. 이 부모들은 얼마나 복이 많으면 자식들을 이런 명문에 다 보냈을까 싶었다. 그리고 “아, 이놈은 100% 떨어질 게 뻔한데......” 생각하면 속이 쓰리고 맥이 빠졌다. 그래도 나는 내색 안 하고 최대한 아들을 격려했다. 그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은 “당당하게” 나가는 것.

“도근아, 어차피 안 될 거, 쫄지 말고 니 하고 싶은 말 다 해라. 밑져야 본전 아이가?”

그리고 아들에 이어 우리를 인터뷰하시는 선생님께는, 우리 애는 공부는 별 볼 일 없다, 그러나 미술 작품들을 보라, 매우 남다르고 창의적이다, 뽑아도 절대 후회 없을 것이다, 꼭 두터운 봉투(thick envelope) 보내 주길 바란다, 하고 말했다. 불합격자에겐 달랑 편지 한 장이 든 작은 봉투, 합격자에겐 제반 입학서류가 든 크고 두터운 봉투를 보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명문들은 달랐다. 평화로운 전원 속에 아름답고 우아한 건물들. 어떤 학교는 입구부터 호수가 두 개 있었다. 마치 무슨 수도원처럼, 다 잊고 공부만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또 어떤 학교에는 복도에 1인용 책상들이 즐비해 있었다. 뭔가 물었더니, 다음 수업 받을 교실이 아직 안 비었을 때, 복도에 서서 기다리는 대신 잠시라도 앉아 공부하는 자리라고 했다. 설사 붙여 줘도, 도근이가 과연 이런 공기에서 숨을 쉴 수 있을까 싶었다. J.F. 케네디 초상화가 걸려 있던 쵸트(Choate)에서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마음껏 다 말하라고 또 열심히 아들을 코치하고 있는데 들려온 뜻밖의 명령!

“여보, 그냥 가요.”

“아니, 왜? 우리 차례 다 돼 가는데?”

“여긴 보니까 한국 학생들이 너무 많아요.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면 공부 안 돼요.”

“한 군데라도 더 면접을 봐야 확률적으로......”

그러나 긴 말 해 봐야 소용 없음을 너무 잘 아는 나. 그쯤에서 입을 닫고 곧장 일어섰다. 제 아무리 대통령이 나온 명문 쵸트(Choate)라도, 아내의 눈밖에 나는 즉시 그걸로 끝이었다.


연애까지 합쳐서 총 22년. 아내는 여전히 “신비(神秘)의 인물”이었다. 거의 “확률 제로”의 게임. 바둥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 그런데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오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매사에 확률/공식이 중요한 나. 무엇보다 세상의 이치/직관을 중요시하는 아내. 우린 달라도 서로 너무 달랐다. 마지막 날, 보스턴 근교의 밀턴(Milton)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유일하게 도심 속에 있고, 비교적 현대적인 건물들의 멋진 캠퍼스. 수연이 왈, 밀턴은 뽑는 인원이 적어, 가장 들어가기 힘든 학교라 했다. 하버드/MIT 교수들의 자제가 많아, “부모의 평균학력”이 제일 높은 학교라고도 했다. 그날, 학교를 안내받던 중 잔디 위를 걸으며 아내가 한 말을 나는 평생 못 잊는다. 듣던 순간, 그 엄마에 그 아들을 한없이 속으로 비웃었기 때문이다.

“여보, 도근이가 지금까지 본 중에 여기 밀턴이 제일 오고 싶대요. 보스턴도 바로 옆에 있고 해서.”

내겐 그 2박3일 여행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헛수고. 그런데 이 “별종의 모자(母子)”는 어디를 골라서 갈지를 벌써부터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는 한국에 왔다. 그리고는 한 달 뒤부턴가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는 떨어졌다, 어느 학교도 또 안 됐다...... 쓰라리긴 해도 예상된 결과들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제일 힘들다는 그 밀턴만 남았다. 다른 데들이 다 안 됐으니, 거기는 더더욱 안 되는 것. 전혀 기대 안 하고 있던 중, 바로 그 “새벽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발신자는 아내. 순간, 내 머리는 컴퓨터처럼 재빨리 회전했다. 똑똑한 우리 수연이가 거긴 어렵다 했으니 확률 0.1%. 그런데 떨어졌다면 아내가 왜 이 새벽에 전화를? 그것도 시부모님 새벽잠 깨우는 줄 뻔히 알면서? 그렇다면 혹시......?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아내의 흥분된 목소리.

“여보, 도근이가 밀턴에 합격했어요!”

딸 50%, 아들 50%. 아내로선 “모계의 100% 책임 완수” 소식을 어르신들 새벽잠을 깨워서라도 알리고 싶었으리라. 하늘은 그렇게 도우시는 것이었다. 내게 늘 한국말만 했던 도근이가, “축하한다”는 나의 인사에 평생 딱 한 번 영어로 말했다. 그때만 해도 이놈이 교회를 좀 다녔다.

“God must have talked to them. (하나님께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게 틀림없어요.)”


아내는 무서운 사람이다. 거의 뜻하는 대로 다 된다. 내가 시카고에서 유학할 때, 늘 세계최고의 도시 뉴욕을 동경하더니, 결국 그 꿈을 이루었다. 뉴저지에 살면서 뉴욕 브루클린(Brooklyn)의 프랫(Pratt Institute)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석사를 받는 과정에서, 온 뉴욕 시내를 2년이나 활보하고 다녔다. 그리곤 어느 날, 중부의 시카고, 동부의 뉴저지에 살아 봤으니, 다음은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싶다고 했다. 아무 근거도, 희망도, 가능성도 없는 꿈 같은 소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딸이 샌프란시스코 벤쳐 대회에서 우승, 거기로 이사해 사업을 일으키는 동안, 아내도 한국 왔다갔다하며 13년이나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살았다. 지금 사는 양평의 집도, 지나치다 우연히 한 번 본 이후로

“야, 저런 집엔 누가 살지? 정말 예쁘다. 다음엔 꼭 저 집에 살고 싶다.”

하는 말을 수십 번 하더니, 두 달 만에 이사 왔다. 매매로 나와 있지도 않은 집을, 부동산을 통해 집주인을 잘 설득해 결국 샀다. 요전의 진새골 사랑의 집도, "없는 빈 집"을 하나 만들고 들어가 그 절경 속에서 8년을 살고 나왔다. 나는 이제 아내가 무슨 염원을 하면 절대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 곧 그렇게 되겠네, 한다.


지난 몇 년, 내가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하는 말이 있다.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바로 당신을 우습게 본 거였다.”

맞다. 세상 모르고 설쳤던 그것이 내가 별 볼 일 없이 된 이유다. 일찍부터 아내를 인정하고 아내에게서 배웠더라면, 내 삶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은 의지 강한 사람의 적수가 못 된다. 그 의지에 하늘의 뜻까지 함께하시면, 천하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리. 나는 오늘도 묵묵히 아내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며 패자(敗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 부르면 쫓아가고, 꾸짖으면 수그리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자식들이 고교 졸업하고부터 각각 자립하여 잘 사는 것도 다 “모계(母系)”의 우수성 덕분임에 감사한다. 아내는 아무튼 참 특별한 사람이다. 엄마가 밀턴의 합격통지 봉투 뜯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던 도근이가 나중에 지 엄마한테 했다는 말,

“엄마, 나는 사람이 우편물 봉투를 그렇게 빨리 뜯을 수도 있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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