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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가는 데 걸린 40년

선생 김봉두에서 삼 남매의 아빠까지

by 금쪽이선생

스물여섯, 첫 발령은 녹차향이 가득한 전남의 한 시골 학교였다.
버스를 갈아타고, 논길을 지나 도착한 읍내에선 가장 큰 학교
교문 앞에서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졸업사진을 찍을 때 입었던 필살기 은갈치 정장을 꺼내 입었다.
이제 진짜 ‘선생님’이 된 거니까.
내 안엔 패기가 가득했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어설픈 열정도 있었다.

2학기 발령으로 맡은 반은 2학년.
아이들은 낯가림도 잠시,
며칠 만에 읍내 2층 건물에 위치한 나의 자취방까지 찾아오며 친구가 되었다.
편의점에서 라면과 과자, 음료를 사 와서는
내 방에서 만화책을 뒤적이고, 라면 국물을 흘리며 웃었다.
어느 날은 학부모가 갑자기 피자를 배달시켜 보냈다.
"선생님, 우리 애 좀 잘 부탁드려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른다.
그때 처음, 이 일이 내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학교는 작았고, 분위기는 가족 같았다.
토요일 수업도 당연했던 시절.
시간이 흘러 격주 근무가 생기고,
언젠가부터 토요일 수업이 사라졌다.
그 변화 속에서 나도 서서히 ‘선생’의 옷에 익숙해졌다.

대학시절부터 술부심이 있었던 터라 술도 많이 마셨다.
특히 나보다 열한 살 많았던 나의 우상 - 교무부장님과의 ‘술 배틀’은

지금도 웃음거리다.
말술로 소문난 교무부장님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과는 무승부. 그날 소주, 맥주 합쳐서 스물일곱 병을 마셨다.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며 출근했는데,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가 “선생님, 얼굴 왜 빨개요?” 하며 깔깔댔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며 나는 교사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스물일곱,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과 다시 만나 결혼했다.
오랜 시간 돌아왔지만, 결국 함께 걷기로 했다.

선생이라는 직업은 밥 굶을 걱정은 없는 삶이었다.
첫째와 둘째가 태어났을 때,
나는 그저 ‘아빠’라는 역할이 생긴 걸 실감했을 뿐,
마음 깊은 울림은 없었다.
육아는 아내 몫이라 여겼고,
나는 무관심에 가까운 방관자였다.

그래도 가끔 소풍날엔 달팽이 모양 김밥이나 문어모양 비엔나 소시지의 도시락을 싸줬다.
계란말이를 태우고, 김밥은 삐뚤 했지만
아이들은 그날을 제일 맛있는 날로 기억해 줬다.


그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풀 할부로 샀던 첫 차.

'프리미엄 럭셔리 포르테'
그 차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여수의 바다, 통일전망대, 안동의 병산서원!
모든 기억에 가족이 함께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에 다녔다.
"아빠랑 학교 가는 거 신난다!"
아이들은 내 교실 뒤편에서 그림을 그리고,
하교 시간엔 내 손을 잡고 운동장을 뛰었다.


그리고 마흔 즈음, 셋째가 태어났다.
이번엔 달랐다.
항상 인생의 1순위가 '나'였는데 처음으로 ‘1순위’가 바뀌었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는 아내가 1순위

아이가 태어난 그날부터는 아이가 1순위,

내 삶은 다시 짜였다.
밤새 울어대는 아기를 안고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이제는 진짜 아빠가 되어야 할 때구나."


아들이 태어난 건, 내 인생의 반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태어난 나를 마주했다.


후회 가득한 나의 삶처럼 살지 않게
다시 태어난 나에게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의 삶을 주셔서..


그렇게 나는
교실에서는 교사로,
집에서는 진짜 아빠로
다시 삶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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