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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미워하고 사랑했던

by 은도

제주살이 어느덧 7개월 차, 혼밥도 7개월 차다. 혼밥을 할 때 메뉴 외에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이 또 있으니, 바로 밥 친구다. 최근 훌륭한 밥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이다. 가장 예민하고 연약한 시기에 만나 서로를 사랑하고 동경했지만, 그만큼 시기하고 미워했던 두 친구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그 애를 떠올렸다.


제주시 평대리


중학교 1학년, 헐렁한 교복도, 새 학교도, 새로운 친구들도 모든 것이 낯설었던 그때, 나는 교실에서 그 애를 처음 만났다. 하얀 피부에 가늘고 길게 뻗은 눈, 광대 위에 콕콕 박힌 주근깨, 앙다문 입술이 야무진 인상을 주었다. 교실 안 소음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 애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하지만 도도한 모범생 이미지를 풍기는 그 애에게 내성적인 나는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교성이 좋은 한 친구와 친해졌고, 그 친구가 형성한 여자애들 무리에 끼게 되었다. 그 무리에 그 애가 있었다. 덤덤한 척하며 속으로는 얼마나 떨리고 설렜는지 모른다. 그 애와 친구가 될 수 있다니, 운명 같았다. 가까이서 본 그 애는 직설적이며 단호했고, 자기 생각을 똑 부러지게 말하는 친구였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해서 친구들에게 끌려다니는 나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던 아이, 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고 그 애와 친해지고 싶었다.


중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를 치렀다. 공교롭게도 그 애와 나는 상위권에 속했고, 성적이 비슷했다. 친구가 되기 전에 우리는 라이벌이 되었다. 중간고사 수학 성적이 아쉬웠으므로 어머니는 나를 동네 수학 학원에 보내려고 했다. 그곳은 그 애가 이미 다니고 있는 학원이었다. 나는 그 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떼를 썼다. 내가 자기를 따라 한다고 생각하여 그 애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그 애는 내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잘해 보자.”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후로 우리는 선의의 경쟁자가 되었다. 시험을 치르고 나면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점수를 물었다. 그 애보다 점수가 높으면 우쭐했고, 점수가 낮으면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속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 애는 굳이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나를 이기면 티가 나게 좋아했고, 내게 지면 다음에는 자기가 이길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서로를 이기기 위해 노력하며 우리는 성장했다. 중학교 내내 라이벌과 친구 사이, 그 어디쯤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다.


제주시 금능해수욕장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2학년이 되자, 나는 이과, 그 애는 문과를 선택하며 라이벌 의식이 희미해졌다. 대신, 힘든 시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친구로서 더 가까워졌다. 가끔 복도에서 만나 수다를 떨었고, 시험이 끝나면 항상 피자를 먹고 노래방에 갔다. 그 애는 인순이와 조PD의 ‘친구여’를 열창하며 랩까지 뱉어내곤 했다. 성격처럼 야무지게 또박또박 뱉어내는 랩 실력마저 그때는 왜 그리 부러웠는지, 집에 돌아와 혼자 그 노래를 연습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그 애에겐 비밀이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연애와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직장인이 된 후에는 사회생활에서 겪는 고충을 나누며 서로의 대나무숲이 되어주었다. 틈틈이 국내로, 해외로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철저히 계획표를 만들어 여행하는 방법도 그 애에게 배웠고, 불쑥 꽃이나 마카롱 같은 작은 선물을 건네는 따뜻한 감성도 그 애에게 배웠다. 직장인 n년 차가 되어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꾸준함과 성실함에 자극을 받아 근성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시간도 있었다.


내가 결혼할 때 그 애는 축사를 건네며 나의 행복을 빌었고, 그 애가 결혼할 때 나는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진과 함께 편지를 건네며 그 애의 행복을 빌었다.

내가 이혼할 때 그 애는 씩씩한 척하는 나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나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몇 년 전, 그 애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담담하게 전했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애는 외려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수술받고 난 직후에는 ‘나 살아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주시 사라봉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애가 미웠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직설적인 말이 내게 상처가 되기도 했고, 확신에 찬 말이 나를 주눅 들게 하기도 했다. 내 콤플렉스를 정곡으로 찌르는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가도 툭 던지는 칭찬 한 마디에 마음이 풀렸다. 그 애의 확실한 주관이 내 우유부단함을 짓눌렀지만 그 덕에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사랑해도 사랑만 할 수는 없었지만, 미워도 미워만 할 수는 없는, 그 애는 내게 그런 친구였다. 그래서 종종 상처를 받더라도 나는 20년이 넘도록 그 애와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벌이었던 10대, 새로운 일들을 함께했던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어, 우리는 인생의 고비를 함께 넘었다. 이제는 미움도, 시기 질투도 모두 사랑이라는 범주 안에 품을 수 있게 되는 듯하다. 내가 제주에 내려온 이후, 우리는 반년 넘게 만나지 못했지만 가끔 메시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니?’ 반가운 메시지 하나에 미소가 지어지고 안도감이 밀려온다. 사랑이 시간을 품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듯, 우정 또한 그렇다. 우정도 사랑의 한 종류이니 말이다. 남은 30대, 40대... 그리고 노년, 드라마 속 은중과 상연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오래 주어졌으면,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우리의 우정은 미움마저 품고 깊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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