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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그의 짧은 네 번째 발가락

by 은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유난히 짧던 네 번째 발가락. 네 번째 발가락은 바로 옆 새끼발가락보다 긴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의 네 번째 발가락은 새끼발가락과 길이가 엇비슷하게 짧았다. 그 사실을 처음 발견하고 나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어릴 때 축구를 하다 다친 후로 그 발가락만 자라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 이후, 나는 불의의 사고로 채 자라지 못한 네 번째 발가락에 마음이 쓰였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그래서 가엽고 안쓰러운. 언젠가 그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발가락이 좋아.” 왜냐고 묻는 그에게 “그냥, 마음이 가.”라고 답했다. 그는 부끄러운 듯 이불 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나는 언제나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보다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 면을 발견하면 마음이 갔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와도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30분이나 우물대는 순수함이 좋았고, 내가 울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는 서투름이 좋았다. 처음 가본 곳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처음 먹어본 음식에 아이처럼 흥분하던 천진함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했고, 내게 맞추기보다 그에게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했다.


그러나 나는 타인에게 아낌없이 퍼주고도 언제나 만족할 만큼 그릇이 크지는 못했다. 가끔 내 그릇보다 넘치게 주거나, 퍼주고 나서 비어버린 공간을 그가 채워주지 못할 때는 불만이 생겼다. 불만은 쌓여 서운함이 되고, 서운함이 쌓여 화가 되면 그 화는 그를 향하기도 했다. 결국 내 그릇에 맞지 않게 더 많이 주려던 욕심이 화를 불렀을까, 아니면 내가 주는 것이 그에게 부족해져서였을까, 그는 나와의 결혼 생활 중 다른 사람을 만나 나를 떠났다. 그 책임을 내게 돌리려, 나의 크고 작은 과오들을 박박 긁어모아 폭탄을 만들어 내게 던지면서 말이다. 난데없이 그 폭탄에 맞은 나는 배신감과 더불어 죄책감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019] 해안동 하늘.jpg 제주시 해안동


사실, 그의 짧은 네 번째 발가락이 왼쪽 발이었는지, 오른쪽 발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와 헤어진 후, 내가 가장 아꼈던 그의 일부분부터 기억에서 하나씩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네 번째 발가락도, 웃을 때 순박하게 드러나던 덧니도,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도, 사랑했던 기억과 행복했던 추억마저도. 지우지 못하면 왜곡했다. 그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 모든 순간의 그를 말이다. 천진한 미소로 위장한 그 가면 뒤에 추악한 마음이 숨어 있었을 거라고, 간악한 의도를 감추고 있었을 거라고 믿어버렸다. 그는 내 안에서 그렇게 괴물이 되었다.


나는 끝내 그를 사랑했던 내 마음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두 마음이 함께라 여겼던 시간 속, 사실은 내 마음만 홀로 남겨져 있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졌다. 언제까지 함께였고 언제부터 혼자였을까 고민하면 머리인지 마음인지가 지끈거렸다. 무너진 마음과 그가 던진 폭탄의 잔해들이 뒤엉켜 거대한 먹구름이 되어 나를 삼켰다. 무겁고 어두운 수증기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랬으므로 내 마음만 그 시간 속에 외로이 남겨져 있으면 안 되었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으니, 과거의 그 마음들이 사실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우기기로 했다. 그러니 그가 떠난 그 자리에 나도 없었던 것이라고. 먹구름에서 빠져나와 숨 쉬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019] 해안동 하늘2.jpg 제주시 해안동


그러나 이제, 나는 용기 내어 고백한다.

사실은 그와 헤어지는 순간까지 아니, 헤어진 후 얼마 동안은 더 그를 사랑했다고.

그의 가장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마저 사랑했다고.


왜 갑자기 그 사실을 인정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이제, 과거로부터 벗어나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내 과거의 사랑을 부정한 채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다. 그 답을 구하기 위해 글과 영화와 음악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내게 말해주었다.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을 품고, 사랑이 남긴 상처마저 품고 나아가라고.


그러니, 이제 나는 그와 나의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한다. 그가 내게 보였던 모습과 마음 그대로를, 내가 품었던 사랑 그대로를, 또한 사랑하며 저지른 크고 작은 실수와 과오를, 그리고 종내에는 그 사랑이 남긴 상처를.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은 채 있는 그대로 품을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답을 찾는 여정은 오늘 이 순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랑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019] 포도뮤지엄 '사랑이란'.jpg 서귀포시 상천리 - 포도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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