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 같던 여름이 갔다. 찰나 같을 가을이 왔다.
제주에서 맞는 세 번째 계절, 마음이 뒤숭숭하다.
봄, 나의 첫 번째 계절은 시작의 설렘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산뜻한 봄기운에 마음이 붕 떠 몸도 가벼웠다. 산으로, 바다로, 숲으로 매일같이 신선한 공기와 새로운 생각을 찾아다녔다. 내게 주어진 매 시간을 충실히 살아냈다.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시간, 나는 서서히 지친 마음과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해 갔다.
천천히 지나가길 바랐던 봄이 가고 여름이 되자, 더위와 함께 불청객이 찾아왔다. 제주에 오기 전부터 내가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바로 그것, 게으름이었다. 마음이 안정되고 낯설었던 이 시간과 장소가 익숙해지니, 그것이 기어이 나를 찾아왔다.
사실 게으름은 어릴 때부터 내 치명적인 단점이자 콤플렉스였다. 잠이 많아 학창 시절에도, 회사를 다닐 때도 아침은 늘 분주하고 급박했다. 1분 1초에 심장을 졸이며 지각을 면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주말에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나 집에서 뭉그적대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루를 흘려보내곤 했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엉덩이 깔고 앉아 생각만 하다가 그만 귀찮아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나를 따라다니던 그것이 마음이 괴로워지고 나서야 떨어져 나갔었더랬다. 마음이 어수선하니 몸이라도 바빠야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봄까지 2년 여의 시간은 게으름이 다시는 내게 들러붙지 못하게 분투했던 시간이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무조건 시작하고 봤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방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은 거의 없었다. 휴일에 늦잠을 자는 버릇도 자연스레 고쳐졌다. ‘불행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네. 오히려 잘 된 건가.’라고 생각할 만큼 마음은 힘들어도 꽤 만족스러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안 변한다 했던가. 그 노력이 무색하게 지난여름, 그것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하루 종일 먹고, 졸고, 유튜브에 들어가 의미 없이 시간을 때우다 저물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제주 여름 나기>에서는 더위와 벌레를 핑계 삼았지만 이제야 고백한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게을러져서’이다. 그 글을 쓰면서 ‘이러면 안 돼.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동여맸다. 점점 늦춰지던 기상 시간을 당기고 복싱을 등록했다. 무더위를 뚫고 이곳저곳을 다니고 거문오름 트래킹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2주가량의 노력 끝에 다시 엉덩이가 가벼워질 무렵, 깁스가 채워졌다.
때는 8월 중순, 지인의 추천을 받고 풋살 체험을 하러 간 날이었다. 해가 지고 나서도 무더운 여름밤이었지만, 20여 명이 모인 풋살장은 사람들의 에너지로 가득했다. 나는 들떴고, 설렜다. 첫날이지만 잘하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다. 마음이 몸보다 앞서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미니 게임을 하다 오른발로 공을 짚고 방향을 전환하는 순간, 발등이 돌아가며 ‘우두둑’ 소리가 났다. 다음날 찾은 정형외과에서 ‘리스프랑 인대 손상’ 진단을 받고 깁스를 해야 했다. 그러니 운동은커녕 산책조차 하지 못하고 집에서 요양하는 날이 늘어갔다. 에너지를 잃으니 잠만 오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가령 독서나 공부, 글쓰기 같은―조차 귀찮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깁스와 함께 게으름과 나태함, 무기력까지 온몸에 단단히 채워졌다.
한 달 후, 깁스를 풀고 가을이 왔다. 돌이켜 보니 충분히 즐기지 못한 여름이 못내 아쉽다. 선선한 바람이 부니 뜨거운 열기가 아쉽고, 밤이 길어지니 낮이 아쉽다. 여름의 생기와 피서객들의 들뜬 에너지가 그립고 끈적한 밤공기마저 그립다. 그땐 그게 그리도 불편하고 싫었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잃고 나서야 소중한 걸 알고, 지나쳐 보내고 나서야 아쉬움에 애가 닳는다. 제주에서의 여름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 아깝게 느껴진다. 나의 매 계절을, 매 하루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면 게으름에 희생된 날들이 조금 적어졌을까.
그렇다고 떠나간 여름의 흔적을 붙잡고 매달려 있기엔 가을이 너무 덧없다. 눈앞에서 스치듯 사라져 버릴까 벌써부터 애간장이 탄다. 나의 세 번째 계절, 이 계절만은 깁스에 희생되지 않도록 지켜내야겠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겠다.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마지막일지도 모를 계절이라는 것을. 매 계절이, 매 하루가 아깝고 아까운 나의 시간이라는 것을. 나의 삶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