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7개월을 꽉 채우고 어느덧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과거의 내가 나에게 준 1년이라는 시간 중 5개월이 남았다. 슬슬 육지에 있는 사람들이 물어온다.
“내년에 다시 육지로 올라오는 거지?”,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카페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묻는다.
“꼭 육지로 돌아가야 해요?”, “계속 글 쓰면서 여기 살면 안 되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육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계속 글을 쓰며 살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아무 확답도 하지 못했다. 꿈과 현실 사이, 나는 지금 그 혼란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 오기 전, 나는 8년 동안 교육회사에서 근무하며 수학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을 했다. 수학 지식뿐 아니라 창의력을 요구하는 일이었기에,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만큼 만족감과 보람이 있었다. 수많은 악조건―지옥철 통근길, 야근과 주말 근무, 박봉 등―속에서 8년이라는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직무 만족도였다.
그러나 연차가 쌓여 과장이라는 직급을 달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과장이 되었다는 건 점차 실무에서 벗어나 관리자로서의 업무를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 역할이 과연 내게 맞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주변에 조언을 구하면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들 그렇게 살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막상 그 자리에 가면 다 하게 되어 있어.”
맞다. 다들 버티고 적응하며 살아간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나만 유난일까, 해 보지도 않고 못 할 거라 속단하는 나는 겁쟁이일까,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관리자가 된 나는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더 늦기 전에 내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다움을 찾고, 나다울 수 있는 일을 찾아,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할 기회. 대신, 1년 간의 제주살이가 끝날 때까지 그 방향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육지로 돌아가 다시 취업을 하겠다고, 나와 거래를 했다.
그렇게 기대와 불안을 안고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현실적인 문제는 미뤄두고 나다움을 찾는 일에 집중했다. 세상의 잡음에서 멀어져 홀로 지내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탐구한 끝에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의 내면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돈이나 경제, 정치 등 세상사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계산적인 관계보다는 순수한 교감을 원하며, 사람들 속에서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에너지를 회복한다. 그래야만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다정할 수 있다. 나는 이성적이지만 감성적이고, 밝은 에너지 속에 고요한 내면을 지니고 있다. 여전히 사랑과 낭만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인 나는, 세상의 기준에서 조금 벗어난 아웃사이더,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나다움을 찾고 나면 내 삶의 방향이 선명하게 드러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다움을 찾을수록 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우왕좌왕 헤매게 된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내가 매주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을까?’, ‘쓰다 보면 글을 쓰는 게 지겨워지고 싫어지지 않을까?’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꾸준히 글을 쓰고 있으며 심지어 글을 쓰는 일이 더 좋아졌다. 게다가 제주라는 공간은 내게 여유와 편안함, 수많은 영감까지 잔뜩 안겨 주니, ‘이곳에서 계속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크게 올라온다. 그럴수록 30여 년간 육지에서 속세의 기준을 학습해 온 자아가 회의적인 목소리를 낸다.
‘적은 나이도 아닌데, 더 늦기 전에 직장으로 돌아가야지.’
‘다들 커리어 쌓고, 연봉 올리고, 집 사느라 여념이 없는데 너는 어쩌려고 그래?’
‘여기서 돈 벌 방법은 있고?’......
끝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는 꿈과 이상을 와장창 깨어버리고 그 자리에 걱정과 불안을 심는다.
그 목소리의 협박에 못 이겨 ‘그래, 일단 돌아가자. 돌아가서 안정적인 직장부터 잡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질문을 한다.
‘직장인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진로에 대한 고민이 없어질까?’
‘돌아가면, 이곳에서 더 찾아보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과연 나는 행복해질까?’
30대가 되어 꿈을 꾼다는 게 이렇게나 자아가 분열되는 일인지 몰랐다. 즐겁고 낭만적인 일일 줄 알았는데, 막상 마주한 건 불안과 걱정, 그리고 현실과의 고독한 싸움이었다. 낯선 세상에 외따로 떨어진 이방인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혼란의 한가운데에 있다. 5개월 뒤, 현실과 타협하여 육지로 돌아갈지, 한 번 더 용기 내어 이곳에 남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은 기간 동안 나는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뮤지컬 작가 박천휴는 꿈을 꾸던 시절 외로웠던 마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꿈이 멀리에 있는 자는 누구나 이방인이네.
그 문장을 위로 삼아, 오늘도 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