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행복하거나 만족감으로 채워지면 장판같이 잔잔한 바다 같은 감정선을 이룬다. 삶이 즐겁다. 앞으로 나의 미래가 화창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삶에 먹구름이 낄 땐 화창한 미래를 꿈꾸기는커녕 원치 않는 생각들에 압도되어 미래의 나를 챙기는 건 과한 욕심이 된다. 때 되면 깊은 지하에 숨어 있다가 먹잇감 찾을 시간이 된 듯 단번에 부정적인 감정이 하나, 둘 기어 나온다.
불만과 타인에 대한 원망과 질투,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불쑥불쑥 원치도 않는 시점에 튀어나올 때면 내 삶에 찾아온 먹구름이 단순히 적은 비를 머금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응축된 구름 안에 한 도시를 바다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분을 머금고 있다. 먹구름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나는 그 생각들을 자아로 여긴다. 과거에 홀로 견뎌내야 했던 수많은 ‘나’ 말이다.
불안했던 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나, 타인의 말에 상처받은 수많은 '나', 약하고 깨지기 쉬웠던 삶에 매 순간 한 장면마다 존재했던 ‘나’들이 하나로 뭉쳐서 불안과 공포, 슬픔으로 휘감긴 감정들이 가지고 올라온다.
어제는 빵과 커피로 쉽게 행복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금세 무기력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잠길 수 있는 것.
원인은 오늘의 '나'가 만든 분노와 무기력감,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내가 알아주지 못했던 수많은 ‘나’들이 횃불을 들고 밖으로 나와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아우성대는 소리이다. 그들이 움직이는 날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명상 아닌 명상을 하거나 아니면 책상에 앉아 펜과 종이를 든다.
이 날은 입 밖으로 내밀면 안 되는 생각과 말까지도 내 안에서는 허용한다.
분노와 저주 그리고 흐느낌의 소리도 과거에 슬픔을 말하려는 '나'들을 위해 내 안에서 허용한다.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은 생각들이더라도, 이 분노하고 슬픈 이들을 내 마음 한 곳에서 허용된다.
‘그랬구나,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때 많이 힘들었었지..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났구나, 내가 알아채지 못한 감정이 있나?’
영화 필름으로 보면 수천만장의 화면이 지나간다. 그 화면 안의 수천만명의 '나'라는 캐릭터는 여전히 슬픔과 무기력감, 분노에 잠겨 있고 그런 그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오늘도 들어준다. 그 아픔도 슬픔도 분노도 모든 것이 떠나가고 텅 비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한없이 그들을 느낀다.
무수히 많은 일들을 겪고 고통스러웠을 나를 위해, 삶에 치여 서글펐을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매너티연
사진: Unsplash의 Annie Spra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