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그 대표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저는 강아지를 혐오했습니다.
멍하니 쳐다보는 눈빛, 먹는 모습, 낑낑거리는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딸아이가 “아빠, 강아지 키우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
저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아빠는 강아지 싫어. 만약 네가 강아지를 데리고 오면, 없을 때 버릴 거야.”
지금 생각하면 참 독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가 강아지를 맡길 곳이 없다며 산책길에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못마땅해하며 "강아지를 왜 데리고 왔냐”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 후에도 후배는 계속 강아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형님 제 입장 좀 생각해 주세요. 이 녀석도 저희 가족입니다.”라고 말하는 후배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저는 늘 강아지와 멀찍이 떨어져 걸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호등 앞에서 우연히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존재였는데, 이상하게 그 순간만큼은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유튜브를 켜고 강아지의 종류, 좋아하는 간식, 소리에 대한 반응,
행동의 의미까지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분명히 혐오하던 강아지였는데, 알고 보니 저는 강아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적 이모님 댁에 놀러 갔다가, 개에게 물렸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제 마음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저는 강아지를 좋아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이제는 후배와 산책할 때 제가 먼저 변을 치워주고,
좋아하는 간식까지 챙겨주곤 합니다.
예전의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싫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두려움일 수도 있고,
혐오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상처에서 비롯된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융의 말처럼,
제가 쓴 페르소나가 너무 오래 저를 대신해 온 탓에
진짜 저는 그림자로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평생에 걸쳐 계속되는 여정임을 느낍니다.
오늘도 그 여정 길 하나를 나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