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아들이었던 사내는 아비의 일을 도왔다. 시골 마을의 목수 노릇이 다 그러하듯, 넉넉하게 부를 누릴 만한 직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은 꾸준하였으므로 삶이 궁핍하지는 아니하였다. 놀고먹는 땅 부자나 침략군의 앞잡이 노릇으로 떵떵거리는 권세가들에 비하면 하챦았으나 결코 기죽지 않을 수공업자로서의 아비의 직업에 그는 늘 당당하였다. 장인(匠人)인 아버지에 대한 자부도 남 못지않았다.
실내 가구라야 고작 돗자리 하나와 땅바닥에 놓인 방석 몇 개, 두어 벌씩 식구들의 옷가지를 가지런히 챙겨 넣은 날렵한 채색무늬로 조금은 가벼운 느낌의 나무 옷장, 사내의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투박한 점토 화병 두어 개가 눈에 띄는 침실이자 부엌, 아니 작업장이기도 한 나사렛의 오두막은 사내가 평생 가져 본 단 하나의 집이었다. 온통 돌쩌귀 울퉁불퉁한 오솔길도 사내에겐 추억이었다. 깡촌이었던 사내의 고향 나사렛은 그의 추억보다 더욱 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평생 ‘나사렛 예수’로 불리었으므로.
조숙하였던 사내는 열 살 무렵부터 언젠가는 그가 고향을 떠나 떠도는 꿈을 꾸었다. 끝내 사내는 아비의 가업을 잇지 못하였다.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미치도록 큰 꿈이 그의 삶을 이끌고 갔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고향을 등진 사내는 갈릴리 호숫가 바람맞으며 집 없이 떠돌았다. 때론 홀로 그 호숫가를 배회하기도 하였고 이따금은 수많은 군중이 그를 따르기도 했으며, 그와 함께 떠돌기로 작정한 몇몇 수행자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날밤을 세우기도 하였다. 떠돌이였던 사내의 일행들은 먹고 마시고 하늘나라 이야기 곧 딴 세상이야기를 즐겨 떠들곤 하였는데 그것은 사내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사내가 서른세 살 되던 해, 그는 그의 말과 행위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 – 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서른세 살 사내의 처음 초상화 속 수염은 초라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거룩’이란 이름으로 그의 얼굴에 긴 수염을 그려 넣었다. 구레나룻이 덧붙여졌다. 짙고 긴 수염은 시퍼런 젊음을 어둡게 가리며 시간이 흐를수록 거룩하게 길어졌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초상속에서 사람이 아닌 신의 얼굴로 변해갔다..
언제부터였을까? 거룩하게 박제된 초상속 그의 길고 탐스런 수염 탓에 그는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긴네렛호수, 게네사렛호수, 디베랴(티베리아스) 호수등으로 불리는 갈릴리호수(the Sea of Galilee)는 동서 13킬로미터, 남북 21킬로미터에 이르는 가히 바다 같은 호수다. 평균수심 약 26미터, 최고 깊은 수심이 43미터나 되는 호수는 따듯한 담수이어서 정어리, 틸라피아, 자바리, 메기, 돌잉어등이 공생하는 풍부한 어장이다. 겨울 평균기온이 섭씨 15도 정도일 만큼 온화한 기후는 호수면을 평온케 하다가도 이따금 요르단 침하지대에서 불어오는 돌풍에 미친 듯 요동치기도 하는 바다, 그 호수가를 비린내 밴 수염 날리며 떠돌던 예수를 찾아내는 길을 떠난다.
‘역사적 예수’ 곧 이 땅을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은 공허하다고 설파한 당대의 뛰어난 신학자 불트만은 예수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였다.
“조심스럽게 예수의 행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특징적인 것은 귀신추방, 안식일 금기의 파괴, 정결법의 침범, 유대인의 율법성에 대한 논쟁, 세리나 창기들과 같은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 아이들과 부인들에 대한 관심 등이다. 또한 예수는 세례자 요한 같은 고행주의자가 아니라 먹기를 탐하고 약간의 술도 마셨다는 것이 인정된다. 이에 더해서 그는 작은 추종자들의 무리를 모았다는 사실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갈릴리 호숫가에서 비린 바람맞으며, 그를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던 예수를 찾아 나선다. 그 길에서 “그이는 자신을 밥이라고 했어요. 먹히는 밥 말이에요. 호구요. 호구. 우리에게 먹힐 밥이라고 했다니까요.” 그렇게 증언하는 그와 함께 했던 갈릴리 무리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만나기 전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거친 수염으로 일하던 예수가 어떻게 거룩한 수염으로 제사상에 앉아만 있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 보는 일이다. 그래야만 예수와 함께 떠돌던 그 갈릴리 촌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