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제법 내리던 날이었다. 우리는 시드니에 사는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드니까지 한 시간 넘게 운전해야 했기에, 준비 시간은 빠듯했다. 가족 모두가 서둘러 옷을 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마지막 점검을 하는 동안, 불만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터져 나왔다.
그때, 딸아이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엄마! 엄마! 빨리 와봐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딸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뒷마당 한가운데, 비를 홀딱 맞은 월라비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월라비? 하고 의아해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시골 호주는 가능한 이야기다. 월라비는 캥거루과에 속하는 작은 유대류로,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에 서식한다. 캥거루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더 작고, 숲이나 바위 많은 지역에서 잘 적응해 살아간다. 사실 집을 짓기 전 이 지역은 월라비의 터전이었다.
아무튼, 집을 짓고 난 후, 아직 아랫집과의 경계를 나누는 담장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였다. 덕분에,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그쪽으로 우리 뒷마당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예기치 않은 손님이 등장할 줄이야!
월라비는 젖은 털을 부스스 털어내며 우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앞주머니 속에서 작고 귀여운 새끼 월라비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 아기 월라비도 있어요!”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너무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혹시 배가 고픈 걸까?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한 조각을 잘라 마당 한가운데 놓고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월라비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사과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남편에게도 알렸다.
“아빠! 월라비가 사과를 먹어요! 우리 집에 왔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고, 월라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를 다 먹은 후 여유롭게 사라졌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월라비는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우리를 빤히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아이들은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고 구경했지만, 순간 망설였다.
사과를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도 보면 야생동물의 삶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한 번 주기 시작하면 계속 의존하게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이번엔 사과를 주지 않기로 했다.
월라비는 한동안 기다리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뒷마당을 빠져나갔다. 나는 불편한 마음과 동시에 안도했다.
‘잘했어, 자연의 법칙을 지킨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사과를 받지 못한 월라비는 처절한 복수를 결심한 것 같았다.
다음 날부터, 뒷마당 여기저기에 정체불명의 흔적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월라비가 우리 뒷마당을 마치 자신만의 화장실처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 양이 점점 늘어갔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처리하기가 더 끔찍했다.
확인해 보니, 아랫집과의 담장이 없는 덕분에 월라비는 여러 군데를 다닐 수 있었음에도, 유독 우리 집에서만 일을 보고 있었다.
월라비는 확실하게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다.
“사과를 주지 않겠다고? 그럼 내가 네 뒷마당을 어떻게 만드는지 한 번 두고 봐.”
그렇게, 자연 속 동물에게 음식을 주는 생태계 교란 행위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우리 집 뒷마당에 아주 자기만의 방식으로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