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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앙코르”

by 램프지니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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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여름은 마치 마지막 앙코르 무대를 선보이는 가수 같다. 떠나기 전에 혼신을 다해 한바탕 더위를 뿌려대고, 그렇게 힘을 다하면 어느 순간 조용히 사라진다.


호주는 한국과 계절이 반대라, 여기가 여름이면 한국은 겨울이다. 문제는, 여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다. 30도를 훌쩍 넘기고, 뜨거운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사람들은 마치 끓는 물에 데쳐진 시금치처럼 축 늘어진다. 징글징글하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나름 사전조사를 했다. 한국처럼 혹한이 없고, 여름에는 덥긴 하지만 건조해서 견딜 만하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따뜻한 남쪽 나라’라는 표현이 괜히 낭만적으로 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첫여름을 맞이하고 나는 깨달았다.


앗, 따가워!!!


뜨거운 게 아니고 따가웠다. 햇볕이 피부를 따갑게 찌른다. 호주의 태양은 강렬하다. 오존층이 얇아 자외선이 강하게 내리쬐면서, 호주사람의 두 명 중 한 명이 평생 한 번은 피부암을 경험할 정도로 발병률이 높다. 병원에서 만난 한 환자는 어릴 적 햇볕 아래서 뛰놀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외선 차단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을 후회했다.  2002년, 나는 선크림의 중요성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결과는? 10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갔을 때, 가족들은 나를 못 알아봤다. 까맣게 탄 내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잃더니, “너 맞아? “라며 황당해했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게 있었다. 한낮에는 40도 가까운 폭염이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거짓말처럼 시원했다. 이게 바로 건조한 더위! 뙤약볕만 피하면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습한 더위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며 애써 위로했다.


그런데, 그게 몇 년 만에 변해버렸다.


기후 변화 때문일까? 호주의 여름이 이제는 후덥지근해졌다. 예전에는 35도가 넘어도 그늘에 숨으면 살 만했는데, 이젠 습도가 높아져 밤까지 덥다. 열대야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맥을 못 추고, 집에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풀가동하며 버틴다.


그렇게 더운 밤이면, 차라리 지인을 찾아가 맥주 한 잔 하는 것도 굿아이디어다. 오랜만에 사는이야기도 나누고 실없는 농담에 웃음꽃을 피우는 재미와 에어컨 바람 아래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잔. 그 순간만큼은 더위도, 짜증도 잊힌다.


여름은 변했지만, 그 여름을 여전히 견뎌내고 있다.


어쩌면 인생도 비슷한 걸지도 모른다.

버티고, 피하고, 적응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늘처럼 잠시 쉬어갈 곳도 생기고, 뜨거운 날에도 시원한 맥주 한 잔처럼 반가운 순간이 찾아온다.


더운 밤, 마지막 앙코르 무대를 감상하는 관객이 되어 차가운 맥주 한 잔과 인생도 그렇게, 견디면서 즐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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