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체계적 양서읽기를 하고 있다.
여름에 니체를 만났고, 겨울에 최진석을 만났다.
계절이 달랐는데도
두 사람의 문장이 같은 방향에서 나를 찔렀다.
“너는 왜 아직도 반응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그동안 최선의선택을 하며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옳은 선택,
유리한 선택,
책임 있는 선택.
그러나 니체를 읽으며 금가던 균열이 깨졌다.
내가 선택이라고 부르던 것들 중 상당수는
사실 선택이 아니라 반응이었다.
익숙한 도덕의 틀 안에서,
이미 승인된 언어와 평가 기준 안에서,
습관과 두려움이 밀어붙이는 방향으로
‘합리적으로 보이게’ 정리된 반응.
나는 자율적이라고 믿었지만
자유롭지 않았던 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니체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어떤 필요와 어떤 두려움에서 만들어졌는지
끝까지 추적해보라고 했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오던 나에게
내가 스스로의 삶이라고 불러온 것들
헌신과 책임이라 칭송한 태도들조차
사실은 “이미 정해진 체계 안에서 덜 위험한 쪽을 고르는 기술”로
조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나는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억눌렀고,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정당화했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나 자신의 가치가 어디서 왔는지
그 기원을 묻지 않는 한 나는 결코 자유로울수 없었다.
내가 옳다고 부르는 것들은 어디서 왔는가
내가 선하다고 믿는 태도는 누구의 언어인가
내가 ‘나’라고 부르는 기준은 내 안에서 생성된 것인가
이 질문을 통과하지 않는 한
나는 주체가 아니라
반응 장치에 머문다는 걸 알았다.
여전히 '척' 하는 인간인것이다.
니체가 해체한 자리 위에서
나는 한동안 서성였고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으며
또 다른 층위의 문장이 들어왔다.
철학적 시선이란,
자신의 삶을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이끄는 것이다.
반응이 아니라 생성으로 사는 것.
자신의 시선과 활동이 외부의 체계가 아니라 자기 기준에서 비롯되는 상태.
문제는
선택을 잘하느냐가 아니었다.
문제는
선택이 필요 없을 만큼
기준이 삶에 '체화'되어 있는가였다.
여기서 기준은
고정된 믿음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해진 믿음 체계에 자신을 맡기는 순간
인간은 가장 쉽게 반응한다.
그 체계는 나를 대신해 판단해주고,
나는 대신 안전해지지만,
대신 내 사유의 주권을 잃는다.
그렇다.
체계에 적응하는 사람은
사회와 마찰이 적다.
그러나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
자기 높이를 지닌 사람은
처음엔 거슬린다.
그러나 변화는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그러자 ‘개방성’의 의미도 달라졌다.
개방적이라는 것은
기준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러 가능성에 휘둘리는 상태도 아니었다.
개방성은
기준이 낮아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것을 맞이할 수 있는 힘이었다.
밀도가 높은 존재는
외부를 이기려 하지 않고,
낡은 옳고 그름과 끝없이 다투지 않는다.
그는 자극에 끌려가지 않는다.
반응은 달라질 수 있어도
기준의 높이는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는
많은 선택지를 가진 상태가 아니라
흔들릴 때에도 낮아지지 않는 밀도가 된다.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지 않는 상태,
이익에 따라 기준이 이동하지 않는 상태,
자극이 강해도 시선이 낮아지지 않는 상태.
양심일까,
기준일까,
높이일까,
사유일까.
그저
자기 높이에서 의심한다.
아마 내가 느낀 두 책의 ‘같음’은
사상의 유사함이 아니라
시선의 고도에서 오는 공명(共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도는
읽는 순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극과 반응 사이에 시선을 세우려 애쓴 시간 속에서
천천히 형성된 밀도인 것 같다.
자유는 더 이상 상황의 산물이 아니다.
그 익숙함조차 다시 감지 할수 있는 감각.
되비춤
그것이 자유의 밀도다.
미세하지만 나에게도 일고있다.
밀도가 자극에 끌리지 않는
순간들이
찰나들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두 글을 읽으며 자문한다.
나는 반응하는 인간인가
생성하는 인간인가
철학적인 활동은 먼저 '자기파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현재의 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의 것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높이를 갖는 것.
'파괴'는 그 높이에서라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