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웜홀
에필로그: 웜홀
"우주물리학에서 웜홀은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통로다. 과거와 미래,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다리.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한 여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우주의 비밀 문이다.
인생에도 이와 같은 웜홀이 존재한다. 우리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하나로 연결하는 특별한 순간들. 그 순간에 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 '시간과 공간의 관계론', 임지수 저
2030년 봄, 마포구의 한 오래된 주택가. 고급 세단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40대 초반의 그는 단정한 캐주얼 차림이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이 소박한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임지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골목길을 걸었다. 5년 전, 아니 10년 전 그가 걸었던 바로 그 길이었다. 시간은 흘렀지만, 이곳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작은 가게들과 오래된 다세대 주택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4층짜리 연립주택이었다. 그의 첫 원룸이 있던 건물이었다. 10년 전, 그는 이곳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월세 30만 원, 보증금 1억으로 시작한 그의 부동산 여정의 출발점.
지수가 건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또 다른 차가 도착했다. 김민주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우아한 원피스 차림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늦었네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미팅이 길어졌어요."
"괜찮아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지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 올라가볼까요?"
그들은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며, 지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 벽에 항상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는데, 여전하네요."
"지금은 전기 자전거로 바뀌었네요." 민주가 웃으며 말했다.
3층에 도착한 그들은 301호 앞에 섰다. 지수의 첫 원룸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아직도 그 열쇠를 갖고 있었어요?" 민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죠. 이건 제 인생의 중요한 유물이니까요." 지수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건물 전체를 구매했어요. 두 달 전에요."
민주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왜 말하지 않았어요?"
"깜짝 선물로 남겨뒀어요." 그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들어가볼까요?"
문이 열리고, 그들은 작은 원룸 안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내부는 10년 전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었다. 창가의 작은 책상, 싱글 침대, 작은 주방 공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모든 걸 그대로 복원했어요." 지수가 설명했다. "심지어 그때 쓰던 책상과 의자까지 찾아냈죠."
민주는 감동한 표정으로 공간을 둘러보았다. "마치 타임캡슐 같아요."
지수는 창가로 다가갔다. 10년 전, 그는 이 창문 앞에 서서 강 건너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그때의 그는 강남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이 성공의 척도라고 믿었다.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는지.
"여기 서 있으니 모든 게 어제 일처럼 느껴져요." 지수가 중얼거렸다.
민주가 그의 옆에 와서 손을 잡았다. "후회는 없어요?"
지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전혀요. 우리가 선택한 길이 최선이었어요."
5년 전, 그들은 강남 아파트를 사는 대신 'SpaceQL'을 창업했다. 부동산 정보의 민주화를 표방한 그들의 프롭테크 스타트업은 이제 산업의 게임체인저가 되었다. 거래 정보의 투명성, AI 기반 가치 평가, 가상현실 부동산 투어 등 혁신적인 서비스로 시장을 재편했다.
'SpaceQL'의 성공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3년 만에 유니콘 기업이 되었고, 아시아 전역으로 서비스를 확장했다. 지수는 CEO로, 민주는 CCO(Chief Creative Officer)로서 회사를 이끌었다. 그들은 사업적 파트너를 넘어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건물을 왜 사기로 했어요?" 민주가 물었다.
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곳은 저에게 웜홀 같은 공간이에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요.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여기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어요."
"새로운 시작이요?"
지수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 건물을 'SpaceQL' 재단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만들고 싶어요. 젊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위한 인큐베이팅 공간으로요."
민주의 눈이 반짝였다. "그거 정말 멋진 아이디어예요!"
"이 작은 원룸에서 꿈을 키웠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자신만의 꿈을 키울 수 있게 돕고 싶어요." 지수가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고층 빌딩들이 10년 전에는 저에게 너무나 멀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제 알아요. 진정한 성공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요."
그는 민주에게 상자를 건넸다. 그녀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반지가 아닌 작은 열쇠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예요?" 민주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5년 전 민주 씨에게 청혼했을 때, 반지를 줬었죠. 이번엔 우리 미래를 위한 또 다른 선물이에요. 이건 제주도에 있는 작은 땅의 열쇠예요. 그곳에 우리가 꿈꿔왔던 '창의적 휴식 공간'을 만들려고 해요."
민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들은 오랫동안 바쁜 서울 생활 속에서 언젠가는 자연 속에서 창의적 영감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나눠왔다.
"정말... 정말 믿을 수 없어요." 그녀가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우리가 진짜 부자가 된 건, 통장 잔고가 늘어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어서죠."
민주는 열쇠를 꼭 쥐며 지수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10년 동안 함께 해줘서."
그들은 작은 원룸의 창가에 나란히 서서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도시는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의 눈에는 단순한 건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무수한 이야기와 가능성이 담긴 캔버스로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민주가 물었다.
"집에 갈까요? 아이들이 기다릴 거예요."
그들은 손을 잡고 원룸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지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창가를 바라보았다. 10년 전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아름다운 여정이 될 거라고.
건물을 나와 차로 향하며, 지수는 문득 돌아보았다. 황금빛 석양이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민주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부의 기하학은 결국 행복의 방정식으로 귀결된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서 있는 공간보다, 누구와 함께 서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민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함께 서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서울의 저녁 노을이 도시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웜홀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부동산이라는 우주를 항해하며, 자신만의 별자리를 그려나가는 여정.
그것이 바로 부의 기하학, 서울 방정식의 진정한 해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