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하면서 무슨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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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학생활을 얘기할 때 러닝을 빼놓을 수 없다. 러닝 동아리 5년 차, 회장 2번, 풀코스 4회 완주의 고인물이다. 더 빠르고 강한 동료들이 주변에 많긴 하지만.
최근에 서울 2호선 한 바퀴 돌기, 총 53km를 뛰었다. 후유증으로 한 달 가까이 러닝을 쉬고 있긴 하지만, 여행하는 듯 서울을 구경한 좋은 경험이었다. 언젠가 또 해보고 싶다.
어쨌든, 서울 내선순환 며칠 전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계획을 알렸는데, 돌아오는 답은 이거였다.
“아니 그걸 왜 함?”
‘러닝은 삶 그 자체다, 왜 사냐고 안 물어보지 않냐’고 허세 있게 말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분명한 답을 못 찾았았다.
왜 뛰지? 하물며 마라톤처럼 긴 거리는, 진짜 왜 뛰는 거지?
이번 글은 ‘러닝을 왜 하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자, ‘나에게 러닝이란?’ 같은 물음에 대한 의미부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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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위해, 나의 ‘우울’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사실 우울을 주제로도 일화를 쓰려다가 소스가 모자라서 못 하고 있었는데, 나이스!)
대학 초반 나는 우울했다. 특히 스무살에는 밤이면 항상 그랬다. 내가 노력하고 잘한 걸 사람들이 알아봐주길 바라는, 관심과 칭찬에 매달리는 마음으로 계속 불안했다. 노는 것도 잘 놀고, 입는 것도 잘 입고, 공부도 할 거면 잘하는 등, 욕심이 이것저것 너무 많았다.
그런 나는 나를 말 그대로 혹사시켰다. 매일같이 새벽에야 귀가했고, 잠도 적게 잤고, 잘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마음의 에너지를 쏟아냈다. 하루종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다가 막상 귀가해 혼자가 되었을 때는, 떨쳐낼 수 없는 막강한 우울이 나를 찾아왔다. (혼자 있기는 싫다는 강박으로 내가 일부러 벗삼았을 수도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이다.)
나는 오롯하게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장소도 없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또 새벽의 쓸쓸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왜 우울할까? 어떻게 하면 우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매일 같이 고민했다.
지금에야 ‘잘 먹고 잘 자기나 할 것이지’ 회상하지만, 그때는 나를 짓누르는 인정 욕구와 애정의 결핍, 자존감 부족 따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밖으로 내던지는 것에 최선을 다했고, 내 몸과 마음을 잘 돌 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주말에도 꾸역꾸역, 전날에 술을 마신 숙취를 안고서도 술약속을 나가는 게 멋있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고생하면서도 그렇게 했겠지.)
나는 그리하여 몸은 지치고 마음은 허한 상태를 기본값으로,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을 골몰했다. 우울 속에서 잘 헤엄하는 영법을 찾으려 했다. 우울의 느낌을 그대로 담아 글을 쓰기도 하고, ‘이걸 했더니 우울이 낮아지더라’ 하는 개별적인 요법을 발견하고 기록하기도 했다.
[우울에서 살아남기]라는, 책 제목 같은 거창한 목표를 가졌기 때문인지, 그 상태는 자연스럽게도 밤마다 내게 찾아와 머물렀다. 경남학사 앞 아파트 공원에서, 기숙사 앞 돌계단에서 나는 새벽이면 잠 못 이루고 우울을 산책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버둥대는 걸 즐기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고, 거기로부터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군대 점호할 때처럼 어김없이, 아침저녁이면 우울은 내 곁에 와있었다.
우울하다 우울해
지금 이 시간엔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해
지금이 몇 시지 열한 시 반
-아이유 [우울시계] (feat. 종현 of SHI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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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이 됐을 즈음 러닝을 시작하면서 드디어 나는 알게 되었다.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울에서 나가는 거라고.
웬 말장난 같지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중학생 땐가, 친구들과 수영장에 갔다. 호텔에 딸린 것이라서 크기가 작고 수심도 얕았다. 어느 한 친구가 수영을 못 한단다.
“에이, 못 하는 게 어딨노, 이런 작은 데서.”
그 친구를 물 속으로 밀었다. 풍덩하는 소리에 따라온 장면은 다름 아닌 어푸어푸 허우적대는 얼굴과 두 팔이었다. 그냥 일어서라고, 그러면 된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듣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나는 꽤나 답답해하며, 물속으로 들어가 한 발을 잡고 바닥에 붙여주었다. 곧바로 두 발로 선 그는 자신의 허리께에서 일렁이는 수면을 잠시 내려다 보았다.
“어 뭐야, 닿는 거네?”
수심 1m인 수영장에서 빠져죽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냐. 물 안에 고개를 처박지 말고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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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화를 이용해 우울을 말해본다. 수영장 물 속에서 두 발로 걸어나오듯 우울에 대한 내 해결책도 단순했다. 그냥 빠져나와서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내 경험에 따라 판단하기에 우울이란 놈은, 몸과 마음이 안 건강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특정한 원인에 의해서 발현되고… 이 상태는 적당히 유지될 때 어떠한 장단점이 있고…’ 같은 게 아니었다. 피곤하고, 굶거나 폭식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나타나는 기분의 가라앉음 그 뿐이었다.
즉, 적어도 나의 경우에선, 몸이 건강하면 우울함이 다소 사라졌었다. 그 단순하고도 핵심적인 원리를 나에게 알려준 것이, 바로 러닝이었다.
러닝을 왜 하냐고?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뛰면 배가 고프고 그러면 밥을 먹는다. 달리면 피곤하고 그럼 잠을 잔다. 제때 먹고 제때 자게 해주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러닝은 나를 건강으로 안내했다. 아무리 복잡하게 접근해도 우리 인간은 그냥 동물이다. 먹고 자고 뛰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정말 많은 부분이 잘 굴러간다.
러닝을 시작한 지 몇 주 만에, 나는 밤마다 우울할 필요가 없어졌다. 몇 년을 우울 속에서 헤맨 나에게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우울수업에 출석해야 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건 청강도 뭣도 아닌 것이었다.
세상에 수많은 스트레스 해소법과 취미가 있지만, 나에게 러닝은 거의 단 하나의 정리이며 단 한 줄의 간단한 공식이다. 특별한 준비도 예약도 없이, 그냥 문 열고 나가서 뛰면 끝이다. 기분이 안 좋거나 생각이 복잡한 날도, 잠깐의 뜀박질 후에는 쓸데없는 고민을 했던 양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실제로 달라지지는 않지만 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실제로 모든 게 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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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보태자면, 러닝을 하면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모든 러너가 한 번쯤은 받아본 질문이 있다.
“러닝하면서 무슨 생각하세요?”
안 한다. 생각을 하다가도 사라지는 게 러닝이다. 발바닥의 앞뒤가 땅에 닿는 순서를 느끼고, 다리의 접힘과 무릎의 울림을 관찰하고, 몸 곳곳에서 오르는 열감을 확인하는 시간 동안, 나는 내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있다는 걸 실감한다.
우울 속에서 헤엄치며 ‘뭐라도 건질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또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지면 덜 우울하지 않을까’ 바라기도 했다. 우울에서 빠져나오는 걸 미루고 미뤘다. (어쩌면 방법을 몰랐을 수도 있고,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표류를 통해 나는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우울에서 건져낸 것들은 죄다 눅눅하고 찝찝한 부정적인 생각들이었고, 내가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말이다.
혼자 있을 때는 그렇게도 가라앉아 있는데 밖에서는 밝고 긍정적이라는 그 이중성을 스스로 자랑인 것마냥 여기기도 했고, 우울을 재료 삼아 글을 쓰는 게 멋있을 수도 있겠다며 으쓱하기도 했던 그 시절이, 마침내 안쓰러웠다. 그 비린 연못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고, 그저 두 발로 일어서서 걸어나오면 된다는 걸, 러닝을 통해 건강해지며 나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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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러닝스승인 이 선생님은, 러닝을 왜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언제부턴가는 살기 위해 러닝하는 게 아니라 러닝하기 위해 사는 거 같아요.”
멋있는 말씀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살기 위해 러닝한다.
러닝이 좋고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지만, 내 삶의 다른 것들보다 우선에 두지는 않으려고 한다. 열심히 하다가 다치기도 종종 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풀코스를 뛴 전후에 무리해서 부상이었던 어느 봄, 러닝동아리 회장이었는데 막상 몇 달을 달리지 못했던 그 답답함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나는 무엇보다, 그저 건강하고 싶다.
잘 먹고 잘 자고 뛰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삶이 살아진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실천하게 해준, 학창시절 근의 공식처럼 핵심적이면서도 단순한, 러닝은 나에게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