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발칙함과 도덕적 의무 사이
요즘, 이기심과 도덕심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마음은 불편해도 내 것을 챙겨야 할지,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내 것을 양보하며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해야 할지. 단기간이면 후자를 택할 텐데, 장기전으로 갈 경우, 딜레마에 빠진다.
퇴직을 하고 남편은 재활운동을, 나는 좋아하는 운동을 당분간 원 없이 했다. 사실, 그러려고 퇴직했다.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재활을 위해 운동해야 했고, 이런저런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어 했다. 나 역시 뚜렷한 퇴직이유는 없었지만, 남편의 재활을 도와야 했고, 에너지가 있을 때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시골에 혼자 지내시던 어머니께서 몇 달 전에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셔서 시골생활을 못하겠다고 하시며 장남집 동거를 원하셨다. 기력이 떨어진 이유를 찾기 위해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했고, 노화로 인한 몇 가지 문제는 시술로 해결했다.
우리나라 의술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많이 발전되어 놀랐다. 심장도 뇌도 작은 구멍을 통해 시술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혼자 지내시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컨디션인데도 이젠 시골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설거지하는 내 뒷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다. 내 심장이 덜커덩! 했다.
침과 함께 꼴깍 삼켰다. 슬쩍 웃으며 뱉었어야 했는데... 급하게 후회가 밀려온다.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한 술 더 뜨신다.
"......"
여전히 마음속으로 꿀꺽 삼켰다. 내가 며느리가 아니고 딸이었으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좀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
시골살이가 싫은 것은 외롭다는 것 외에도 아들, 며느리의 편안한 집에 기거하고 싶은 이유도 있음이 짐작된다.
삼시세끼 먹거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사랑하는 큰아들이 있는 집, 더군다나 내 아들은 동네사람들이 칭찬하는 효자가 아닌가? 시대가 어떻게 변했던지 간에 어머니는 옛날 분이시고, 큰아들과의 동거는 오래전 꿈꾸어 왔던 어머니의 꿈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아들이 있고, 나이 먹을 만큼 먹어 꼰대인 나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건만, 문제는 30년을 넘게 따로 살아온 우리와 갑작스레 동거할 어머니의 결심에 내가 적잖이 당황한다는 거다. 언젠가는 동거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지내보니 여러 가지로 쉽지 않다는 걸 체감한 뒤였다.
그렇다고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아들과 살고 싶어 하시는데 그것을 반대하는 것도 사람 된 도리는 아닌 거 같은 생각에 나는 괴롭다.
사람 도리를 하고자 동거를 선택할 경우 나는 다음 세 가지 일상을 양보해야 한다.
첫째. 신선한 여름 새벽 공기.
해뜨기 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기는 시간은 이러려고 퇴직했지! 를 느낄 수 있는 원픽(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이다. 원래 나는 활동적인 사람인지라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향이다. 내가 일상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여름날, 새벽운동이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지나 공원까지 가는 길은 내 근력과 심폐지구력을 올려 주는 소중한 공간이다. 공원에 도달하여 스케이트장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시간은 내 심장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최고의 순간이다. 근처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기고 떠오르는 글감을 찾는 새벽시간은 출근 걱정 없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지키고 싶은 나의 일상이다. 이 시간엔 남편도 10km 동네 둘레길을 걷는다. 그런데,
국이 있어야 하는 어머니의 아침식사를 챙겨드리고 나면 여름 해는 중천으로 올라가는데, 땡볕에 자전거와 인라인을 탈 생각은 없다. 밥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눈 뜨자마자 라이딩고글을 쓰고 타이트한 복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는 며느리를 어머니는 이해하실 수 있을까?
둘째, 퇴직한 우리 부부를 엮어주는 취미생활.
퇴직한 우리 부부를 멀어지지 않게 엮어주는 것 중 하나는 '골프'다. 골프연습장에도 같이 가고, 퇴직한 다른 부부와 평일 라운딩도 나가고, 태국에도 가끔 간다.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골프취미를 못하는 것은 막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다.
농사짓는 일 외는 딱히 취미생활이 없는 어머니를 아파트에 홀로 두고 우리 부부는 사이좋게 골프연습장에 갈 수 있을까? 무료하지 않도록 산책을 같이 하거나 드라이브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남편도 슬그머니 본인의 운동을 패스한다. 이건 명백하게 퇴직사유에 위배되는 일이지 않은가.
셋째,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다닐 퇴직 버킷리스트, 차박여행.
같은 동네산길을 맨날 걸을 수는 없지 않나? 남편의 재활운동과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합쳐 우리는 지난봄부터 남파랑길을 꾸준히 걸어오고 있었다. 오는 여름에 도전할 '몽블랑트레킹'을 대비하며, 체력을 기르는 프로젝트였다. 동해바다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을 지나,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탐색할 만반의 준비로 차박 관련 물품을 하나씩 마련하며 꿈에 부풀어 있던 시기였다.
어머니를 홀로 두고, 꿈을 이루기 위한 차박여행은 가능할까?
어머니의 병원순례를 이어, 큰아들과 동거할 어머니의 결심은 화려하게 계획했던 우리의 퇴직 후 일상을 스톱시켰다.
어머니와의 동거를 생각하면 일주일은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다. 늘 지내오던 일상은 잠시 멈추고 일주일 효도는 어설픈 큰며느리도 할 수 있다.
맛있는 거 사드리고, 우리가 사는 곳 보여드리고, 심심하지 않게 옆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기력이 없을 때는 안쓰럽고, '내 미래도 이와 같으리!' 라며 측은해서 보살펴 드리다가도, 기력이 살아나시고 눈빛이 또렷해지니,
'왜 스스로 챙기지 못하시고 당신의 일상이나 거동에 보살핌을 받으려고 하시지?'
루틴이 뭉개지는 날은 더욱더 속에서 부화가 오른다. 이기적이고 발칙한 생각에 이성적 사고가 힘을 못 쓰다가,
'아들과 지내고 싶다는데, 외롭다는데, 너 참 나쁜 며느리로구나...!'
저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도덕적 의무감이 고개를 든다. 쿨하지 못한 나는 한동안 말 못하고 끙끙 댈 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