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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나의 완전한 자주독립’

누가 내 소원을 묻는다면

by 예몽

누가 내 소원을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나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는 세 번째 물음까지도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리 높여 말씀하셨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마이 라이프를 중시하는 나는 ‘나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이라 소리 높여 말하고 싶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한 내 모습은 어떨까?


원하는 계절에 원하는 곳으로 좋아하는 여행을 마음껏 다닐 수 있겠지?

친구를 찾거나 누구를 동행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혼자서 하루를 보낼 수 있겠지?

좋아하는 일을 원 없이 한 뒤, 지난날을 추억하며 사그라지는 내 육신을 받아들이겠지?

불꽃처럼 춤추며 신명 나게 살다 간 이 생(生)과 미련 없이 이별할 수 있겠지?


진정 그리하고 싶다!


내 영정사진 앞에서 누구든지 슬퍼하지 마소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다가 불꽃 되어 사라진 행복한 여인이었다오.


심리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하면 이 삶의 마지막도 축제처럼 3일을 즐기다, 웃으며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는 시골로 가셨다. 건강을 회복하셨고, 아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내 기준에서) 뒤, 멈춰진 아들의 일상을 놓아주셨다. 시골에서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지만, 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선 삼시세끼 후 산책이 전부였지만, 시골에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마당과 집 앞 뜰이 있고, 동네 정자도 있다. 동네 정자에 모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료한 시골의 한낮을 달래주기도 한다. 반복되는 아파트 생활에서 어머니는 또 시골생활이 그리워지셨나 보다.


결국, 외로움이 문제였다. 끝없이 ‘아들 집이 내 집, 든든한 큰 며느리’를 강조하시며 은연중에 우리와 어머니를 묶어두려 하셨던 것은 든든한 내 편을 확보하고 싶으신 어머니의 심리적 결핍에서 비롯된 거였다.

“어머니, 자주 놀러 오세요.”

시골로 가시던 날, 어머니 손을 잡아 드렸다.

“그래, 데리러 와라~ 전화하면, 데리러 오고!”

약속을 받아낸 아이처럼,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든든한 부모를 가진 아이처럼 마음이 훈훈해지셨다.

아들, 며느리가 내편이라는 믿음만 있으면 어머니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프면 바로 달려오는 아들을 보고, ‘아들이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야 기운을 차리고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셨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꼴깍 삼키고 깊은 속내를 보이지 않은 것을 잘한 일이다. 내 속내를 다 보일 필요는 없다. 순간적인 기분은 그냥 흘러갈 것이고, 후회할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꼴깍 삼킨 덕분에 우리 관계는 유지될 수 있었다.


훗날,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후회하거나 많이 슬퍼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그때 슬퍼할 일이라면 지금 잘하자. 가시는 길,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보내드리려면 상처로 남을 말 정도는 꼴깍 삼켜야지. 잘했다, 예몽!’


어머니와 나 사이에 남은 시간은,

그래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났으면 좋겠다.

아들을 남편처럼 의지하려는 어머니의 마음, 자기 계발이라는 단어조차 모르고 오로지 한 가정을 일구는 것에 평생을 보내신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 아울러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노인의 고독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도 머지않아 인생의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

적어도 독립은 해야 할 일이다.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그래서, 우리 아들은 며느리 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나는 나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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