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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려고 퇴직했지.

평범하고 단단한 일상을 위하여

by 예몽

퇴직 한 지 1년 반이 되었다. 먼저 퇴직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출근하지 않는다는 것 빼고는 삼시 세끼를 먹어야 하는 하루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화려한 일상을 꿈꾸며 퇴직했지만, 화려함 보다는 단단한 일상이 중요함을 안다. 거창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더없이 소중하다.

거창하지 않고 평범한 내 하루가 무너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고요하게 하루해가 저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라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벽돌 하나 무너지면 담이 무너져 내리듯,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주어야 단단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아들들이 직장생활 잘하고 자기 할 일 해주는 것, 어머니께서 씩씩하게 건강한 하루를 보내시는 것, 남편이 하루 분량의 운동을 마치고 무탈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이 모든 무탈함들은 평범하지만 단단한 일상을 위해 꼭 필요하다. 가족 중 누군가 아프면 모두의 일상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무탈한 일상 속에 나는 MSG(아미노산과 나트륨이 결합한 조미료, 네이버 어학사전)를 넣는다.


주로 새벽운동으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아주 가끔 동호희사람들과 바다에서 카약도 탄다. 자주 남편과 스크린골프로 내기해서 점심을 얻어먹기도 한다. 소소한 취미활동을 즐긴 날에는 하루가 충만해서 꿀잠을 잔다. 남편이 병원생활을 하던 시기에 찾아온 갱년기 불면증을 생각하면 꿀잠을 잔 하루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날이다.

동호인들과 즐겼던 카약



배우다 말았던 수영을 끝내려고 강습을 신청했다. 날개를 가볍게 펴고 날아오르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접영을 끝까지 배우고 싶다. 지난주에도 혼자 접영을 하다가, 살려주세요! 포즈가 나와서 결국 강사님께 개인강습을 요청했다. 강습이 끝나면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을 재현할 수 있을까? 멈추지 않으면 늦더라도 언젠가는 물속에서 자유를 얻을 거라 믿는다.


MSG의 최고는 '여행'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집을 두고 나는 왜 캠핑이나 차박이나 낯선 곳에서의 숙박을 즐길까? 새로운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설렘을 준다. 내 속에 남아 있는 호기심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우물 같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내 호기심을 채우려고 따라나서는 남편은 20대 초 철없이 에너지 넘치는 여자를 선택한 벌일지도 모른다. 부디, 다음 생은 요리 잘하고 조신한 짝지를 만나길.


간혹 남편은 종종 거리며 하루를 보내는 나를 보고

“좀 쉬기도 하지 왜 그래?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출근하지도 않는데 커피 마시고 잠 오지 않으면 늦잠자도 되고, 멍하니 있어도 보고, 그러려고 퇴직했지!”


하지만 나는 언제 무탈한 일상이 흔들릴지 조바심이 난다. 나이는 못 이긴다는데 언제 내 체력이 고갈될지, 건강하신 어머니께서 언제 병원신세를 지며 우리 일상을 바꿔놓을지 알 수가 없다. 느긋해지려고 퇴직한 건 아니다.


에너지가 있을 때 배우고, 즐기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천직인 줄 알았던 직장을 나온 것이다. 지금도 가끔 직장에서 좋았던 날들이 떠오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둘 다 가지기엔 벅찼으므로 가슴 뛰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30년 이상 견디며 보낸 직장근무는 경제적 안정을 보상으로 주었다. 정년퇴직 후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겠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정년 후 시간을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건강하던 남편에게 갑자기 뇌경색이 찾아 오리라고 나는 1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일상이 지겹지 않아서 다행이다. 남편이 뇌경색 발병 이후 무탈한 일상을 다시 회복해 주어서 무엇보다 감사하다. 신이 다시 준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며 나의 놂을 합리화해 본다.




얼마 전, 여자친구와 연애하다 헤어진 둘째 아들이 내게 말한 내용이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더 높여준다.


"엄마, 결혼해서 가정을 일구고 아이 낳고 살려고 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엄마 아빠처럼 지지고 볶고 싸우며 알콩달콩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던 아들은 직장생활도 힘들고 가정을 이루는 일은 더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로또만큼이나 안 맞는 배우자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이만큼 산 것이 내가 봐도 기적 같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와 준 두 아들도 신께서 증명하신 기적이다.



"맞아! 평범한 가정 이루는 거 결코 쉽지 않아.

엄마도 평생 일군게 우리 가정이지. 그래도 좀만 더 노력해서 엄마를 할머니 만들어 주지 않을래?"


기운 없이 말하는 아들 손을 잡고 힘인 듯 힘이 못 되는 부담감을 더해 주었다. 여전히 철없는, 참으로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엄마다.


청소년기에 아들이 엄마가 건물주 되어주면 자기가 건물주 아들로 꿈을 바꾸겠노라고 나더러 좀 더 노력해 보라는 말과 다름없는 소리다.


아들이 노력하고 기적이 이루어져서 내가 할머니가 된다면 MSG 강했던 내 일상은 접어두고 새로운 할머니로서의 일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할머니가 된 일상!!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그날이 오기 전에 평범하고 단단한 내 일상을 마음껏 누리고 지키려 한다. 이러려고 퇴직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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