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 일.

사...실, 아니지 2

by 나길

“법적으로 문제없어!”


응답하라 1988 드라마 속 보라의 대사다. 성보라와 성선우의 비밀 연애가 들키고, 동성동본을 이유로 반대하는 부모님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다. 법은 현재의 국민들의 요구로 또는 오랫동안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 쌓인 서류들이 아주 천천히 해결되는 과정 같다. 물론, 많은 페이퍼의 결론은 어떤 이에겐 좋을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이 문장의 ‘법’은 내게 다른 의미다.

‘법’이 아니라 ‘법적으로’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광범위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남편, 아들, 딸이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의자를 당겼다. 의자가 무거워 끌 듯이 당겨 앉았다.




몇 주전, 남편은 나에게 내가 듣길 원치 않았던, 그 말을 했다.

작년부터 경기가 곤두박질치면서 회사의 경제적 상황도 동반, 아니 더 드라마틱하게 급감했고 20명가량 되는 직원들의 월급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점점... 내가 조금씩 모아 왔던 돈을 잠시 빌려달라고 했던 시기가 그즈음인가 싶다. 나는 정말, 바보다. 아무것도 몰랐다.

남편이 기울어가는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 매일 시계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멈출 수 없는 그 초침 위에서 다음 초의 움직임을 두려워하며 죽으라 달리는 동안 나는 몰랐다. 그저 조금 견딜 수 있는 위기 정도라고 흘려보냈다. 평소 다른 이들보다 새까만 얼굴에 흙색 물감이 한 방울씩 스며들어 짙어지는 동안, 그 순간순간을 나는 냇물에 흘려보냈다. 그는 그 냇물에 빠져 흐느적 허우적 발버둥 치고 있었는데도 나는, 그가 보는 나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는 야속한 기러기였을까...


나는 굉장히 남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삶에 속한 그의 사업과 주변 사람들, 관련된 일과 회사들까지 모두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 묻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먼저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어도, 내가 묻는 질문들을 꼼꼼히,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더 말이 없었고, 그런 그가 때론 나를 허기지게 만들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는 고맙게도 조금씩 변해갔다. 그의 노력과 호르몬의 영향이었을까. 그는 회사에 계약이 성사된 날이면 여우비처럼 뜬금없이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날은 햇볕대신 하얗고 따뜻한 조명 가득한 현관에서, 중간에 놓인 슬리퍼를 비집고 선 그의 발이 거기에 박혔다. 거기서 쏟아내기로 한 것 같았다. 맞다. 난 예보되지 않은 여우비를 피할 어떤 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로 그냥 맞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먼저 할 이야기가 있다고 내 눈을 보며 이야기했다. 간접 조명들과 예쁜 가구들로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 현관 입구는 더 새하얗게 눈이 부셨고 그의 까만 얼굴은 흙갈색 물감이 얼굴로 스며들 듯 더 깊이 새까맣게 변해가다 결국 흰 가구들 전체로 뚝! 뚝! 떨어졌다.





아이들은 분위기를 알았다.

남편이 오랫동안 지금 우리의 상황을 설명했다.

최악의 상황이 오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거취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주 자세하게 집은 곧 채권자들에게 넘어가게 될 거고, 우리가 앉던 소파, 누웠던 침대,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던 식탁, 자동차, 은행 통장, 카드, 보험 등 모든 소유가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거라고. 보험을 해지하고 통장에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들, 우리가 모르는 돈들까지 찾아내서 빚을 갚는데 써야 한다고 했다.


그 ‘법적으로’ 우리는 어떤 소유도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었다. 아니,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어마어마한 것을 소유하게 될 거였다. 나의 것 하나 남김없이 쥐어짜주어야 하는 빚으로. 그 말이었다.


평소엔 나가서 쓸 수도 없는 십 원짜리 동전 하나도 더 이상 아이들에게 지원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또 우리는 평생을 갚아도 해결할 수 없는 그 무거운 거머리 같은 가난이란 돌덩이를 아이들에게 옮겨 붙이고 있었다. 나는.. 점심시간 배가 고파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던 내 어린 시절의 슬프고도 조그만 굽은 등을 아이들에게서 보았다. 내가 결코 떨쳐버리지 못한 어린 시절 쌓이고 쌓인 누더기 옷을 그렇게 옮기고 있나 죄책감에 살이 떨렸다. 눈은 분명 아이들을 향해있는데, 내가 보는 건 나였다.


아이들은 대충 분위기를 알겠다고 앉아 있었지만, 자기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아빠의 이야기가 귓속을 지나 눈으로 통과되는 듯했다. 그렇게 눈동자가 흐려졌다 다시 짙은 황갈색으로 돌아왔지만 더 투명해져 커졌다. 아이들의 눈에서 작은 수정들이 뚝! 뚝! 식탁으로 떨어져 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기고 사라지고 남기고 사라지고 결국 아이들의 가슴속에 남았다. 나는 남편의 꽉 다문 누런 치아 사이로 삐져나와 퍼렇게 변해버린 입술의 크고 작은 살갗들과 식탁에 떨어진 영롱한 눈물에 비친 아이들의 흐린 얼굴만 보는 눈 없는 망부석이 되었다. 지금 이 사단을 만든 남편이 원망스러운데도, 그의 삶의 발자국을 외면하지 못해 못 본 척하는 내 눈을 도려내고 싶었다.


이미 식탁 한 구석에 던져버렸는데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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