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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의 특징 : 생존형 실용주의

국제 정치 무대에서의 한국

by 삼중전공생

한국 외교의 대전제 : 실용주의


중견국은 강대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약소국은 아닌 '중간 정도의 대국'을 말합니다. 국제 정치에서 강대국만큼의 주요한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약소국 정도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수준은 아닌 국가를 통칭하기 때문에, 그 범주에 속하는 나라들은 꽤 많고 또 논쟁적입니다. 가령 캐나다와 호주가 전통적인 중견국이라면, 터키나 폴란드는 신흥 중견국, 에티오피아나 파키스탄은 지정학적 맥락에서 중견국으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한국도 당연히 이 중견국에 속하고, 또 대표적인 중견국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한국 외교의 큰 그림도 한국의 국력과 지정학적 위치가 중견국이라는 전제 위에서 그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실용주의입니다. 왜 그럴까요?


① 능력 결핍 : 외교 자산의 부족


중견국은 정보전, 외교 네트워크, 자율적 작전 능력 등이 부족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핵심 이익과 관련된 사안을 챙기는데 온 국력을 집중하기 때문에, 강대국처럼 전 세계적인 외교력 행사 인프라를 구축할 역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애당초 국제 이슈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판에 끼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가령 예맨의 후티 반군이 홍해를 장악해도, 한국은 상선들을 조용히 희망봉을 넘겨 돌아가게 만들지 영국이나 미국처럼 대함대를 파견해 공군과 미사일로 쓸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② 의지 결핍 : 원수 만들지 않기 전략


만에 하나 운 좋게 자신이 해당 국제 분쟁에 개입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중견국은 관여하지 않습니다. 행여나 그런 분쟁에 개입했다가 다른 국가나 집단에 원수를 지게 되면, 차후에 중견국 체급에 감당할 수 없는 큰 비용을 지불해야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중동은 한국의 에너지 수입, 건설 수주, 다자외교 표 확보 등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국은 굳이 시아파-수니파 간 분쟁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멍청한 대통령'이 아닌 이상 "이란은 UAE의 적" 같은 발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는 것이 비용 대비 이득이 가장 큰 전략이고, 중견국들은 그런 차원에서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원수가 생기더라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강대국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중견국은 국익을 계산하여 실용주의를 전략적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실용주의는 외교 정책에서 다양한 특성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실용주의에서 배태된 한국의 외교 전략


① 내정불간섭


한국은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일어나는 내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이나 의료시설 폭격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내지 않습니다. 한국 외교관들이 비윤리적이라서 그렇다기보다, 그 일들이 당장 한국의 국익에 관련이 없고 섣불리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외교적 원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건, 이렇게 한국이 내정불간섭 원칙을 지킨다는 '빌드업'을 쌓아야지 중국이나 미국이 한국에게 무리한 요구를 강요할 때도 '우리의 주권 문제'라며 받아칠 명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전 세계에 쓸데없이 여기저기 개입하고 다니면서 '내정불간섭' 원칙을 강대국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면 전혀 설득력이 없는 레토릭이 됩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그럼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북한에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건 내정 간섭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한국은 국내법 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국제법에서는 국내법의 규범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실'로서 적당히 감안해 줄 뿐이지만, 그럼에도 한국이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정간섭이 아니라고 말할 '명분'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분명히 큽니다. 한국의 일부 진보 세력에서 말하듯 '한반도 두 국가 체제'로 한국이 북한을 공식적으로 국가로서 인정하게 되면,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 사안과 관련된 각종 국내 정책을 집행할 명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② 다자외교 선호


강대국은 기본적으로 양자외교를 선호합니다. 자신이 가진 협상력을 충분히 이용해서 상대국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같은 거 왜 하냐고 따졌던 겁니다. FTA 자체도 문제지만, 만약 하더라도 각국과 일대일로 협상하면 더 크게 상대국을 압박할 수 있는데, 왜 소국들이 뭉쳐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판을 깔아주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대중국 포위의 인도-태평양 안보 전략을 경제 협정으로 뒷받침하려는 비전 하에 오바마가 추진했던 것이지만, 트럼프는 그런 복잡한 사정은 전혀 신경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니 넘겨둡시다.


하여간 그런 문제 때문에 중견국은 다자외교를 선호합니다. 한국만 미국을 상대하기에는 벅차지지만, 한국과 함께 폴란드나 아르헨티나도 함께 목소리를 내준다면 미국이 무시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또 UN, WTO, WHO 같은 다자외교 무대에서는 '룰'의 힘에 기댈 수 있습니다. 한국에게 불리한 조치가 취해질 때, 그것이 '룰'에 어긋남을 지적하면 보호받을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자외교는 많은 명문화된, 혹은 불문율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규칙을 잘 활용한다면 강대국의 압박에도 대응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③ 소극적 군사 외교


중견국들은 대체로 자국 국익에 결정적으로 관련이 있지 않는 한 군사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군사적으로 매우 '소심한' 편에 속합니다. 터키는 시리아 내전과 리비아 내전에 깊이 관여한 바 있고,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에도 무기지원 등으로 개입했습니다. 호주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했고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미국의 자유항행작전(FONOPs)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폴란드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자국이 가진 구소련제 무기들을 통 크게 우크라이나에 넘겼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나마 있는 해외 파병인 자이툰부대(이라크), 동명부대(레바논), 청해부대(소말리아) 등도 모두 비전투 작전 중심으로 꾸려졌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미군을 통한 우회적인 포탄 지원에 그쳤습니다. 1970년대 있었던 베트남 전쟁 파병 이래로 국제무대에서 이렇다 할 군사 행동이 없는 것입니다. 중견국 중에서 재래식 군사 전력이 가장 강력한 국가임을 감안하면, 이 정도 체급의 국가 치고는 상당히 드문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원수 만들기'에 매우 소극적인 국가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이 가진 '특히나 소극적인 군사 외교'는 일반적인 중견국이 가진 특성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납득하기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한국이 수출 의존형 무역 국가라는 점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쳐서 그렇습니다. 한국이 국제 분쟁에 섣불리 개입하면, 원수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한국 기업들은 그만큼 소중한 시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단순히 시장만 잃는다면 다행입니다. 에너지나 식량 혹은 핵심광물 같은 전략 자원의 수입이 어려워진다면, 이건 그저 원수를 만들었다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의 존망이 달린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한국은 군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국제 분쟁에 외교적 관여 자체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G7에 한국이 가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 목소리도 나오는 겁니다. 위신이나 명예를 별론으로 하고, 실리만 따지자면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그냥 조용히 존재감 없이 돈만 벌고 사는 것이 가장 낫기 때문입니다.


④ 균형외교 (전략적 모호성)


미중 사이에서 균형 내지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도 실용주의 외교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 견제를 위해 안보는 미국에 의지하면서도, 거대한 시장을 가진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이중의존 구조를 구축한 것은, 정치 체제나 이념에 종속되지 않는 실리 중시 외교의 특성이 뒷받침된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야 말로 한국 외교의 구조적이고 심대한 특징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인데, 이것을 차차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이 처한 특수한 구조적 환경


① 분단 체제의 결과


a. 지나친 안보 중심적 외교관


한국 외교의 초점은 언제나 북한과 관련된 안보 리스크 관리입니다. 안보에 결정적으로 위협이 되는 국가가 명확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은 모든 국제 문제를 '그래서 이게 북한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러니 국제 관계의 중요도가 '북한 문제'를 기준으로 매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단연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이 됩니다. 한미동맹이 한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대북 억지력이기 때문에, 한국 외교는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한국에게 이득이 돼도 한미동맹을 훼손하면 시도할 수 없고, 한국에게 손해라도 한미동맹을 지킬 수 있다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견국 중에서도 외교의 전략적 자율성이 굉장히 작습니다.


b. 정권마다 오락가락하는 대북 정책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가 가장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복지 이슈도, 경제 이슈도 아닌 '대북 문제'입니다.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한 입장이 그 사람의 정치 성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또 이 문제를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갈라집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이 평화주의와 강경주의를 오락가락하고 일관된 정책 집행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미숙하기 때문이라기보다, 동북아의 국제질서를 규정짓는 분단 체제 자체가 끼치는 영향입니다. 한국인에게 북한은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규정지어야 하는지부터 합의가 되지 않고, 그렇기에 북한을 대화 상대방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단지 멸망을 기도해야 하는 주적인지도 결론이 안 나는 겁니다. 이런 합의가 되지 않는 것은 이 분단 체제가 기본적으로 '휴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 관계가 결론이 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② 미중 이중의존의 결과


a. 전략적 모호성(ambiguity)인가 전략적 무력감(helplessness)인가


전략적 모호성이 입장을 '안' 정하는 거라면, 전략적 무력감은 입장을 '못' 정하는 겁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입장을 안 정하는 걸까요, 못 정하는 걸까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단을 내리는 순간 한국은 선택하지 않은 국가의 보복이나 불이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사드(THAAD) 사태로 이미 학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실리를 추구한다는 실용주의의 차원을 넘어서 피해 최소화 중심의 생존형 외교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결정의 지연', '회피', '중립적 수사'와 같은 답답한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b. 국내 정치의 외교 정책 간섭


통상 외교 정책은 국내 정치의 논리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전략적 자율성이 큰 강대국일수록 더욱 그런 측면이 많은데, 한국은 앞서 말했듯이 전략적 자율성이 거의 없는 국가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치가 외교에 깊이 개입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국민들이 외교 문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미국이 강대국이라는 점에 더해서, 각각 한국의 경제와 안보에 직결되는 국가들이기 때문에 외교가 국민들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큽니다. 이를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이용해 상대 정파의 외교를 '무능 외교', '종속국 외교', '굴욕외교' 등으로 프레임을 짜서 정치 공세를 퍼부으니 사태가 악화되고 일선 외교관들이 위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외교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습니다.


③ 19세기말 역사적 경험의 결과


a. 국제적 고립 트라우마


1880~1910년 동안 조선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결국 침탈당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그 침탈의 결과, 가혹하면서도 민족적 자존감에 큰 상처를 남긴 일제강점기가 이어지면서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 강대국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에 극단적인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트라우마가 이후로도 계속 자극되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한국이 배제된 애치슨 라인 선포 이후 김일성의 오판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당시에 당사자였던 한국이 아무런 의견도 내지 못한 채 철저히 배제되면서 이후 배상 문제와 영토 문제 등이 꼬였습니다. 1994년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한 제네바 협약 당시에도 한국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사후 통보만 받았습니다. 이후 벌어진 동북아 6자 회담에서도 주요 합의는 북중, 북미 회담에서 나왔습니다. 2018~2019년 트럼프-김정은 회담에서도 한국은 협상을 성사시킨 주도국이었음에도 일방적인 미국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순간마다 언론에서 반복된 레토릭이 '구한말 상황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구한말의 기억이 정치적 상징 자본으로 아직도 활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한국은 강대국의 메시지나 조치에 극단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고, 버림받고 고립되는 것을 매우 경계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견국 사이에서 보편적인 실용주의 외교를 넘어선 공포와 불신의 심리로 봐야 합니다. 이는 한국의 외교 결정을 극도로 보수적으로 만들었고, 개입보다 방어, 모험보다 중립, 행동보다 침묵을 택하게 만들었습니다.




결론 : 한국 외교는 생존형 실용주의다


정리하자면 한국의 외교는 실용주의입니다. 실용주의인데, 일반적인 중견국의 실용주의와는 결이 다릅니다. 한국은 '생존형 실용주의'입니다. 분단 체제와 미중 이중의존 구조는 한국 외교의 전략적 자율성을 크게 좁혔고, 일관성을 훼손했습니다. 이런 지정학적 재난 상황 속에서 세계 10위 규모의 무역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외교관들은 기인에 가까운 현란한 줄타기 묘기를 구사하며 물밑에서 피가 나는 노력을 이어왔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외교는 따라서 생존을 위한 실리 추구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미중 갈등으로부터, 국내 간섭으로부터, 국제적 고립의 트라우마로부터의 생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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