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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북한 '핵보유국' 발언, 실수인가?

트럼프는 종북주의자인가?

by 삼중전공생

현재 상황


3월 13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마크 뤼터 NATO 사무총장과의 회동 중 기자들에게 '김정은과의 관계를 회복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핵보유국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I would ... I have a great relationship with Kim Jong Un, and we'll see what happens, but certainly he's a nuclear power.)"라고 발언했습니다.


트럼프가 북한을 "핵보유국(a nuclear power)"으로 지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2기 임기를 시작하며 러시아와 중국의 핵무기를 언급하며 '핵군축'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김정은'도 핵군축 협상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당시 로이터 통신은 '이 발언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는 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했는데, "첫 임기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할 것"이라는 백악관 공식 답변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 언론이 '퍼온' 기사 내용은 발언 순서 등에서 오류가 있습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도 돌이켜 보면, 트럼프의 돌출 발언을 실무진과 관계자들이 다시 정정하거나 번복하는 일은 많았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제 국가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이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절차와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행정부의 최고결정권자는 트럼프입니다. 트럼프가 반복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하는 것은, 대북 문제를 둘러싼 트럼프의 현실 인식을 분명하게 노출시킵니다. 이런 신호를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트럼프의 '북한 핵보유국' 발언, 왜 문제인가?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하는 것은 여러모로 심각한 문제를 낳습니다. 한국에게 심각한 문제를 끼치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국의 국익을 더 심대하게 훼손합니다. 이제까지 줄곧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이 뻔히 핵실험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도 오바마 행정부가 두 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따져봅시다.


(1) 국제정치적 파장 ① :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의 균열


북한은 2003년 NPT 체제를 탈퇴하여 NPT 체제의 통제를 받는 국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국제정치에서 국제법 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맥락입니다. NPT 체제를 지지하는 서방 세력, 특히 미국의 전략적 목표를 거스르는 북한의 핵무장은 그 자체로 NPT 체제의 실효성을 훼손시킵니다. 만약 미국이 NPT 체제를 이탈한 북한의 핵무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면, 이란과 같은 또 다른 미국의 적성국이 NPT를 자유롭게 탈퇴해서 핵무장을 완성해도 미국 입장에서는 시비를 걸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이 '핵무장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국가들'이 우수수 NPT를 탈퇴해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사실상 NPT에는 미국이 NPT 체제가 없어도 핵무장 여부를 통제할 수 있는 우방국 내지는 약소국들 밖에 남지 않게 되면서 NPT 체제가 붕괴하는 효과를 낳게 됩니다.


(2) 국제정치적 파장 ② : 동맹국과의 협력 체제 파열


한국이나 일본 같은 국가들은 북한의 핵무장에 대단히 관심이 많습니다. 이들 국가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오랜 전략적 목표로 삼아 왔는데, 미국이 이들과 충분한 협의 없이 무작스럽게 북한의 핵보유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이들은 이 문제에 관해 더 이상 미국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으로 정책 방향을 아예 선회하게 되면, 미국의 협조 없이 북한의 비핵화도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들 국가의 대북 핵문제 정책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특히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핵무장론이 진지하게 부상할 수 있는데, 미국은 이때 한국의 핵무장을 저지할 명분을 상실하게 됩니다.


종합적으로 NPT 체제가 붕괴하면서 미국의 적성국들이 핵무장을 시도하게 되고, 동맹국들의 신뢰를 배반하면서 동맹국들의 핵무장 저지 명분도 상실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말 그대로 '핵도미노'가 무너질 개연성이 충분히 존재합니다. 한국이 핵무장을 하면, 일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란이 핵무장을 하면, 사우디아라비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들 국가가 일단 핵무장을 하게 되면, 각자 커다란 전략적 자율성을 얻게 됩니다. 미국이 더 이상 군사력으로 이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제 사회에서 현재 미국이 보유한 영향력도 산산조각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미국이 그토록 핵심적인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는 '대중국 견제'도 원하는 대로 달성할 수 있을까요?


(3) 협상 전략상 문제 ① : 북한을 대등한 협상 상대방으로 인정


나보다 상대방의 인내심이 더 부족하면, 나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주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레버리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과 매일 인민들이 굶어 죽고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약소 독재국가 간의 사이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트럼프 이전까지 미국은 북한을 '불량국가(rogue state)'로 취급하며 동등한 대화 상대로도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위상을 깎아내려서 내가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 자체를 중요한 카드로 활용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게 되면, 미국은 이제 북한의 존재가 자신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즉 앞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레버리지로 협상을 요구할 때면 미국은 이전처럼 '일방적 무시'로 대응할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미국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카드 한 장을 그냥 아무런 대가 없이 내다 버리는 셈입니다.


(4) 협상 전략상 문제 ② :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이 협상의 종착점이 될 수 있음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지 않으면, 미국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북한은 핵무장을 '시도하고 있는 국가'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도'를 중단하고 원래 상태로 복귀해 '비핵화'하라는 요구가 더 자연스럽게 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가 협상의 출발점이라서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가 협상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협상의 종착점을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으로 삼는 프레임을 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CVID)로부터 아무런 대가 없이 한 발자국 멀어지는 것은 북한 입장에서는 '선물'이나 '횡재'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5) 국제법적 문제 ① : UN 대북제제의 형해화


UN 대북 제제는 북한의 핵 개발과 탄도미사일 실험이 국제사회가 용인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북 제제를 실질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입장을 선회해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면, 미국 행정부는 다른 국가들이 이 대북 제제를 준수하는지 감시, 감독할 명분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대북 제재 시행의 명분이 흔들리게 되면 중국이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대북 제재 '무시'가 일어날 수 있고, 이로 인해 사실상 대북 제제는 안보리 결의로 해제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붕괴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대북 제재 해제'를 레버리지로 사용하면서 북한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요? '대북 제재 해제' 레버리지가 사라진 미국은 도대체 북한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게 있기나 할까요?




트럼프는 종북주의자인가? : 북한의 핵보유 공인이 한국에 미칠 영향


우리나라 극우들이 문재인 보고 간첩 타령할 게 아닙니다. 제가 볼 때 트럼프보다 더 우려스러운 종북주의자가 없습니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해 줄 수는 있죠. 치밀한 협상 전략상 계산이 뒷받침되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트럼프는 아무런 대가 없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지칭해주고 있습니다. 김정은을 협상장에 일단 끌어내려는 유화적인 립서비스일까요? 그런데 립서비스라도 레드라인은 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트럼프가 돌발적이고 예측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 이런 발언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나 정부가 그나마 적다는 건 다행입니다. 오바마 대통령 입에서 '북한은 핵보유국' 같은 발언이 나왔다고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질 일 아니겠습니까?


그치만 중요한 건 트럼프의 '인식'입니다. 트럼프가 북한의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미국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으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트럼프-김정은 회담에서 어떤 뜨악할 결론이 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한국의 입장이 철저히 배제된다면, 그래서 북한이 미국에 의해 잠정적으로 인정받는 핵보유국이 된다면, 한국은 앞으로 '불법적 핵보유'를 고리로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압박하고 고립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입지가 늘어나고, 북한이 '정상국가'로 취급받을 여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적성국의 행운은, 한국에게는 뼈아픈 불행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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