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코타(JAKOTA) 삼각협력의 가능성 타진
현재 상황
미국은 중국을 세계 첨단 반도체 시장에서 배제시키고자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을 지탱할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첨단 반도체의 안정적인 수급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적 목표는 미국이 단순히 관세나 수출규제를 부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일본은 소재·장비, 대만은 비메모리 반도체에서 각자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이들 국가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곱게 말로만 부탁할 정도로 상냥한 강대국은 아닙니다. 가장 친절한 방식이 보조금 프로그램 배제이고, 관세나 무역규제 나아가 안보 협력 문제까지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대만은 각자 반도체 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는 기술 강국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미국의 협박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일본·대만이 협력해서 미중 갈등에 대처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재코타(JAKOTA) 삼각협력의 이점
재코타(JAKOTA)는 일부 언론인들이 일본(Japan), 한국(Korea), 대만(Taiwan)을 합쳐서 부르는 용어입니다. 이들 국가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사실상 섬나라이고, 제조업 중심의 경제 대국이면서, 미국이 세운 인도-태평양 전략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소한 공통점으로는 같은 유교·한자 문화권인 데다 산이 많다는 것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이들 사이에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세 국가가 전략적으로도 협력 관계를 맺는다면 얼마나 각국에 이점이 있을까요? 우선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중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 위치를 확보하고 막강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중국이 동·서해를 휘젓는 무력시위를 하거나 막말을 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미국이 주권 존중은 개나 줘버린 각종 협박으로 우방국을 개처럼 부리는 일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두 강대국 사이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재코타 삼각협력은 각국에게 큰 이득입니다.
재코타(JAKOTA) 삼각협력이 불가능한 이유
하지만 언뜻 보면 좋기만 해 보이는 이 삼각협력은, 사실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합니다. 한일관계가 안 좋기 때문 아니냐고요? 그런 진부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예로부터 국가 경제가 박살 날 위기에 처하거나 안보가 급박하게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 어느 국가에서나 과거사 문제는 사소한 이슈로 취급받았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는 게 국제 정치라는 점을 잊지 맙시다. 그렇다면 저는 왜 재코타 삼각협력이 왜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걸까요?
(1) 비용의 증대가능성 : 미국이 방해하기 너무 쉽다
미국은 한국, 일본, 대만 각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안보적으로 이들 국가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이들 국가에 행사할 수 있는 레버리지가 너무 강력하고 많습니다. 가령 대만이 재코타 삼각협력에 속해서 세계 반도체 공급을 미국의 심기를 거슬러 제멋대로 조종한다고 해봅시다. 그럼 미국은 대만 안보 문제에 관해 '지켜보고 있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됩니다. 대만의 안보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이 부분을 파고들면 대만을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한국이나 일본도 경제나 안보 문제에서 미국이 비협조적으로 움직이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구나 반도체 공급망에는 한국, 일본, 대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반도체 제조 핵심 기술과 시스템 반도체 설계 능력을 미국이 갖고 있습니다. 재코타가 반도체 시장 자체를 독점하고 있다면 강력한 레버리지가 되겠지만, 미국이 협조하지 않는 이상 재코타가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자의적으로 교란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미국이 다른 더 효과적이고 리스크가 적은 레버리지를 놔두고 파운드리 의뢰 중단 등의 자신도 출혈을 감수하는 바보 같은 방식으로 재코타를 압박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한계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순 없겠습니다.
따라서 재코타 삼각협력은 구조적으로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조치를 취할 수 없습니다. 즉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이든 행정부 때의 CHIP4와 뭐가 다를까요? CHIP4야 미국이 압박하니까 중국에 할 말이라도 있었지, 아무런 실질적 이득이 없는 협력체를 중국으로부터 '반중 동맹'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냐는 날 선 짜증을 들어가면서까지 자발적으로 꾸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만에 하나 그렇게 설령 재코타가 꾸려지더라도, 중국도 핵심 광물 수출 통제로 얼마든지 재코타를 깨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2) 이득의 축소가능성 : 체급이 커서 협력이 절박하지 않다
재코타 삼각협력이 각국에게 이득일 수는 있습니다. 가령 한국이 대만과 파운드리 경쟁을 멈추고, 소재·장비의 독자 생산을 멈추는 대신 일본에서 수입하면 막대한 기회비용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낀 기회비용을 삼국이 서로 모아 차세대 반도체 R&D에 공동 투자하면 훨씬 효율적인 혁신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국가의 체급이 이런 식의 협동이 절박할 만큼 작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비극입니다.
우선 한국은 대만과 파운드리 경쟁을 하면서 자신이 이기거나 적어도 유의미하게 시장을 차지할 수 있다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소재·장비 같은 경우에는 독자 생산으로 수입 대체를 시도하고 있고, 이미 성과도 내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이 파운드리 시장도 차지하고, 소재·장비도 독자 생산하면 사실상 반도체 공급망에서 실제 생산은 전부 한국이 독점하게 됩니다. 한국이 재코타 협력의 이득보다 그 독점의 이득이 더 크다고 판단하는 한, 그리고 그 판단을 실제 국력이 받쳐주는 한 한국의 재코타 참여는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일본은 자국의 반도체 산업 부흥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전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어대고 있는 상황입니다. 꼭 자국 기업에 의한 제조는 아니더라도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서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인데, 만약 한국·대만과 반도체 협력을 한다면 이런 목표를 다소간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를 느낄까요? 반도체 소재·장비는 독점하고 있지만 일본은 그 시장에만 만족할 생각이 없고, 그 욕심을 뒷받침해 줄 국력이 있습니다.
대만은 입장이 약간 다르지만 결론은 같습니다. 한국이 파운드리 경쟁을 자제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 대가로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서 협력해야 한다면 대만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만에게 반도체 산업은 단순히 국가 경제의 버팀목 수준이 아닙니다.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보호를 보장받는 중요한 레버리지인데, 차세대 반도체라고 다를 건 없습니다. 만약 차세대 반도체의 핵심 기술과 생산을 한국과 일본도 함께 하게 된다면, 대만은 자신의 '대체가능성'을 느끼고 미국이 보호를 철회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불안에 빠질 것입니다. 결국 대만은 파운드리든 차세대 반도체든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재코타(JAKOTA)는 망상인가?
재코타, 협력하기에 비용은 크고 이득은 적습니다. 미국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존재로 남는다면 존속이야 되겠으나 존재의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미국을 거스르자니 미국이 각국을 배신시킬 수단이 너무 많고 강력합니다. 그렇다고 그 배신을 억제할 만큼 막대한 이득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딱히 아닙니다. 세 국가가 뭉쳤을 때 의미 있는 시너지를 낼 만한 게 반도체뿐인데, 각자 서로를 절박하게 필요로 할 만큼 약소국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결국 재코타 삼각협력은 각국에게 부분적으로 이득이 되는 부분도 있겠으나, 내쉬 균형은 아닙니다. 개별 국가로는 국제 사회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어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탄생한 아세안(ASEAN)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결국 현재 상태에서, 재코타가 동북아의 전략적 세력 균형을 움직일 정도의 무게감 있는 다자협의체가 되기는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습니다. 지금 수준에서는 "트럼프가 자꾸 한국, 일본을 막 대하네? 한국, 일본, 대만이 힘 합치면 좀 세지 않을까? 그럼 못 덤빌 텐데..." 정도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한국이 일본, 대만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큰 틀에서 반대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저는 그런 협력의 한계가 뚜렷하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한국이 트럼프의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좀 더 창의적인 전략 구상이 필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