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는 비상사태 선포, 배경에는 앱스타인이 있다
트럼프가 워싱턴 D.C.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지역의 경찰권을 장악했습니다. 동시에 주 방위군 800여 명을 치안 유지에 동원했고, 필요에 따라 추가로 배치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문제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FBI 자료에 따르면 워싱턴의 폭력범죄는 2023년 대비 35% 감소하여 30여 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살인, 강도, 무장 차량 강탈, 그리고 위험한 무기를 이용한 폭행 사건도 감소했습니다. 난데없는 트럼프의 '비상상태' 선포에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지난 7월 중순부터 정치적 위기를 맞아 지지율이 37% 수준으로 떨어지며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이 트럼프가 미국 사교계의 거물들에게 미성년자 성상납을 자행하던 앱스타인(Jeffrey Epstein)에게 외설적인 그림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는 보도 직후 앱스타인 리스트에 트럼프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증폭됐기 때문입니다.
이후 WSJ은 앱스타인 리스트에 실제로 트럼프가 있다는 추가 폭로를 이어갔고 트럼프는 그런 앱스타인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잡아떼는 형국이 이어졌습니다. 트럼프가 대선 전에는 미성년자 성상납을 받은 앱스타인 리스트에 있을 미국 내 좌파 거물들의 민낯을 드러내야 한다며 대통령이 되자마자 공개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기에 사람들은 앱스타인과 트럼프 간의 관계를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상사태 선포는 이런 앱스타인 사건이 게이트 수준으로 번져가던 와중에 벌어졌습니다. 트럼프가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을 움직이는 쇼를 했다고 볼만한 이유입니다. 군대는 경찰력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 없는 최악의 사태인 경우에 한해 최후의 수단으로 치안 유지의 역할을 맡아 내국인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 상식적인 원칙임에도, 오직 자신의 권력과 정치적 안위를 위해 뚜렷한 폭력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군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트럼프의 모험은 계속된다(?)
의회가 연장시켜주지 않는 한 트럼프의 워싱턴 D.C.에 대한 비상 권한은 30일 후 자동만료되지만 그때 가서 또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도 있고 공화당이 상하원 과반을 모두 차지한 상태에서 의회가 이를 저지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군과 연방 경찰에 의해 워싱턴 D.C.의 치안이 유지되는 상황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트럼프는 민주당 출신 흑인 주지사들이 있는 지역들 모두에 대해 연방 정부의 통제를 강화할 수 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무리한 모험을 벌여나간다면 그의 희망대로 앱스타인 리스트는 대중의 관심에서 당분간 잊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과의 관세 협상이 마무리되고 연말연초에 본격적으로 미국 소비재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면 트럼프의 지지율도 반등할 모멘텀을 잃고 지금과 같은 30%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 가서 앱스타인 리스트가 다시 주목을 받으면 트럼프는 비상사태 선포 말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제가 이전 게시글에서 트럼프가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같은 정치적 모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워싱턴 D.C.를 군을 통해 통제하고 있는 지금, 전국 단위 계엄령 선포를 트럼프가 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곧이곧대로 군인들이 트럼프의 지시에 따를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런 일이 현실화된다면 그 혼란은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에 비할 바가 못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