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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캄보디아 국경분쟁이 미중 대리전이 아닌 이유

by 삼중전공생

현재 상황


7월 24일부터 고조된 태국-캄보디아 간 국경분쟁으로 다수의 군과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양국의 국경분쟁은 1904년과 1907년에 걸쳐 체결된 시암 왕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간 국경 획정 조약의 모호성에 기인한다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 분쟁이 전면전 위기로까지 비화된 것은 무언가 또 다른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맞는 듯 보입니다.


그 요인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분쟁을 시작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올해 5월 28일, 분쟁 지역인 프라삿 타 무엔 톰 사원에서 짧은 교전이 발생하여 캄보디아군 1명이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호주 전략정책연구소(ASPI)의 위성 데이터 분석가 네이선 루서(Nathan Ruser)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5월 28일 총격 사건 이전부터 해당 지역 진지를 강화했었고 그 이후로도 증원군을 배치해 왔다고 합니다. 이는 캄보디아가 이 무렵부터 이 지역의 분쟁을 활용하여 어떤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양국 관계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태국군이 캄보디아 국경분쟁 지역에서 순찰을 하다 지뢰 폭발로 부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입니다. 태국군이 피해를 입은 지뢰는 러시아제 PMN-2 대인지뢰인데, 이는 태국이 사용하거나 비축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캄보디아 관련 페이스북 페이지에 캄보디아 군인이 분쟁 지역에 지뢰를 매설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곧 삭제된 일까지 벌어지자 태국은 7월 23일 캄보디아 주재 대사를 소환하고 캄보디아 대사를 추방한 뒤 모든 육로 국경 검문소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양측의 주장이 상반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여태껏 태국의 대화 제의를 계속 거부해 오고 일련의 군사 도발을 지속해 온 캄보디아의 행위를 미뤄볼 때 캄보디아군이 먼저 로켓포를 사용해 병원 등 민간인 지역을 선제 공격했다는 태국의 주장이 잠정적으로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캄보디아는 왜 이런 식으로 태국을 도발했을까요? 태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가 25위인 지역강국이지만 캄보디아는 95위로 제대로 된 전투기 하나 없는 약소국입니다. 캄보디아는 자신보다 몇 배는 강한 상대를 도발해서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일까요?




태국 탁신 전 총리와 캄보디아 훈 센 의장 간의 불화


태국의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그의 딸인 패통탄 친나왓 총리를 비롯한 탁신 일가는 오랫동안 캄보디아의 독재자인 훈 센 상원의장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탁신 전 총리가 군부 쿠데타로 태국을 떠나 있을 때 훈 센이 탁신을 경제고문으로 고용해주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지난 6월에 유출된 패통탄-훈 센 간 통화 중에 패통탄 총리가 훈 센 의장을 "삼촌"이라고 부르기까지도 했으니 두 가문이 얼마나 친밀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문의 우정에 최근 들어 금이 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5월 28일 국경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한 이후, 태국은 자국민의 캄보디아 카지노 방문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였는데 이로 인해 캄보디아 포이펫 지역의 카지노와 호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한 외신 보도에 따르면, 태국이 국경 통제를 강화한 이후 포이펫 카지노 호텔의 객실 점유율이 일주일 만에 42% 급감했다고도 합니다. 문제는 이 카지노와 호텔을 운영하던 캄보디아의 카지노 거물이자 상원의원인 코크 안(Kok An) 등이 훈 센 의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태국 정부는 국경 통제 강화의 명분 중 하나로 '국경을 넘는 온라인 사기 단속' 또한 내세웠습니다. 태국 경찰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보이스피싱 사기단을 수사하며 그 배후가 캄보디아 포이펫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이 수사 과정에서 태국 당국은 코크 안을 태국인 사기 피해와 연루된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자산을 동결하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태국의 행보가 훈 센과 그의 측근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훈 센 의장이 지난 6월 패통탄 총리와의 통화 녹음을 유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통화 녹음에는 패통탄 총리가 국경 분쟁으로 자국군 사상자가 나오는 와중에 태국군을 깎아내리거나, 훈 센 의장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며 굽신거리는 음성이 담겨있었습니다. 훈 센 의장은 자신의 측근들에게 해당 통화 녹음을 공개하면서 "내가 먼저 배신당했다"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패통탄 총리는 현재 헌법재판소에 의해 직무정지를 당해 정국 주도권을 상실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훈 센이 탁신 일가에 배신감을 느낀 것과 국경 지역 도발을 늘린 것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탁신과 태국 군부와의 오랜 악연 또한 살펴봐야 합니다.




태국 군부를 이용해 탁신 일가를 제거하려는 훈 센 의장


통신 재벌 출신인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은 2001년 타이락타이당(Thai Rak Thai Party)을 창당하여 포퓰리즘 공약으로 농촌과 저소득층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그 해에 총리가 됩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연속적으로 집권하던 탁신은 2006년 9월 19일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 방문 중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축출되게 되고, 2023년 8월 프아타이당(Pheu Thai Party)이 집권하기까지 장장 15년간 해외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탁신의 해외 망명 생활 중에도 태국 내에서 친나왓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한 것은 탁신 친나왓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덕분이었습니다. 그녀는 2011년 총선에서 프아타이당을 이끌고 승리해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이후 오빠의 포퓰리즘 정책을 계승하며 농민과 저소득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 또한 2014년 5월, 헌법재판소의 해임 결정으로 실각하게 되고 그 직후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부를 전복함에 따라 마찬가지로 해외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탁신 일가와 태국 군부는 이런 방식으로 오랜 기간 권력 투쟁을 이어왔습니다. 탁신 일가가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태국의 전통적인 기득권인 왕실-군부-관료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하면, 군부가 부패 혐의와 왕실에 대한 불경 등을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전복하는 패턴이 고착화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023년의 정권 연정은 탁신 일가와 군부의 예외적인 불편한 동거에 가까웠습니다. 2023년 총선 이후, 프아타이당이 탁신의 귀국을 조건으로 군부와 왕실에 비판적이었던 진보 정당인 전진당(Move Forward Party)을 배제하고 군부와 연계된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하는 '빅딜'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훈 센 의장은 국경 분쟁을 고리로 바로 이 탁신 일가와 군부의 불안정한 연정 구조를 이용해 군부에 의한 탁신 일가의 숙청을 도모하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태국은 표면적으로는 패통탄 총리가 직무정지 된 후 품탐 웨차야차이 총리 대행이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총리 대행을 포함한 탁신 일파는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군부에 의해 지휘가 이뤄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가령 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댄 찬타부르주와 뜨랏주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도 품탐 총리 대행의 지시가 아닌 군사 국경 방어 사령부 사령관이 직접 계엄령 시행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전체적인 양상은 훈 센이 패통탄과의 통화 녹취와 추가 폭로 예고(특히 왕실 모독 관련)로 탁신 일가를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아둔 사이, 태국 군부가 자국민의 애국주의 여론을 고취시키며 캄보디아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 보복을 통해 판을 키워 자국 내 영향력을 확보해 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정국이 지속되면 군부를 중심으로 태국인들이 단결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녹취록 공개 직후인 6월부터 태국인들은 국경분쟁 문제에 있어서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31%인데 반해 군에 대한 신뢰도는 86%에 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기가 땅에 떨어진 탁신 일가라면 군부가 정치적으로 제거하기도 더욱 수월할 것입니다. 훈 센 의장이 통화 녹음 공개와 국경 지역 도발을 통해 노린 효과도 이것으로 보입니다.




결론: 태국-캄보디아 국경분쟁이 미중 대리전이 아닌 이유


캄보디아 훈 센 상원의장이 판을 깔아줬고, 태국의 군부는 그 위에서 열심히 놀아주는 것일 뿐입니다. 태국이 다소 친서방적인 면모가 있고, 캄보디아가 전통적인 중국의 우방이긴 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는 크게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중국이 캄보디아를 지원할 명분도 이유도 없고, 실제로 지원하고 있지도 않으며, 캄보디아가 그걸 바랄지조차 의문스럽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번 사건의 여파로 탁신 일가가 태국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태국 군부가 사실상 정치권력까지 장악하여 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게 되면 그것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동남아시아에서의 미중 패권갈등에 예견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 F-16이 날아다니니까 친미, AK-47을 쓰니까 친중, 이렇게 단순무식하게 상황을 딱 잘라 편가를 수 없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사태가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캄보디아가 태국에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다면 중국이 개입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캄보디아에는 중국 해군이 이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하는데 필수적인 해군 기지도 있는데다 트럼프가 태국과 캄보디아에 공평하게 관세를 때릴 테니 전쟁을 당장 멈추라고 협박하는 황당한 뻘짓을 하는 동안에 이 분쟁을 잘 중재한다면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한층 더 키울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한국 언론들이 모든 국제 현안을 미중갈등의 렌즈로 먼저 바라보는 기묘한 습관이 이번 사건마저도 친중이냐 친미냐로만 단순히 구별 짓는 '만물 미중갈등설'을 만들어냈다고 봅니다. 지역 사정을 조금 상세히 알아보면 다른 시선에서도 충분히 합리적으로 사안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상습적인 민주주의 파괴범인 태국 군부를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이 중국인을 상대로 국가 GDP 규모의 보이스피싱 사기를 치는 캄보디아를 후원하는 것도 아니니 한국 언론의 그런 '미중 대리전' 프레이밍은 사실 다소 섣불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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