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능케 하는가?
중년의 나이까지 살면서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나의 눈은 항상 외부를 향해 있었고 나의 내면을 바라다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남을 사랑했을지언정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 나 자신을 깨닫게 해 준 것이 최면이었다. 최면은 내가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울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 나는 왜 항상 즐겁지 않았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첫 번째 최면상담 세션에서 상담사가 지금의 감정과 가장 관련 있는 기억으로 가라고 했을 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기억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그때까지 살던 동네에서 버스정거장 1코스 떨어져 있는 곳의 단칸방에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던 당시, 아버지는 출근하면서 짜장면 먹으라고 50원을 줬지만 나는 그 돈으로 그 동네 삼류극장 입장권을 사서 하루 종일 극장에서 빈둥거렸다. 먹을 것도 없고 놀거리도 없고 친구도 없는 단칸방에 혼자 들어가기 싫었던 것이었다. (학교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그 한 해 동안 나는 키가 1센티 크고 몸무게는 줄었다.)
영화관에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듯한 그 초등학교 2학년의 나는 속으로 펑펑 울고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은 실제로 전혀 울지 않았었는데, 내면아이는 펑펑 울고 있었던 것이다. 외로워~, 억울해~, 슬퍼~, 원망스러워~ 소리치면서 울었던, 초등학교 2학년의 억눌렸던 감정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서야 폭포수 같은 눈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외로워하는 초등학교 2학년의 감정을 몇 차례에 걸친 최면상담을 통해 "정화"를 했다. 사실 그때 괴로워했던 초등학교 2학년은 이제 아무 데도 없다. 오직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 초등학교 2학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이제 아무도 없다. 오직 나만이 그 기억의 노예가 되었고, 그 기억이 오늘날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초등학교 2학년의 외로움과 슬픔, 억울함과 원망은 이제 하나의 망령이 되어서 귀신처럼 떠돌다가 나에게 시시때때로 엄습해 온다. 나는 그 망령을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이, 마치 귀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듯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떠올리고 다시 반복해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끊어야 한다. 예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유롭게 해서 우리가 그런 기억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와 질 때, 그때에서야 우리는 자유로워진 현재 의식으로 즐겁게 인생을 창조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명상, 참선, 기도, 요가 같은 것도 비슷한 기능을 하리라고 짐작은 들지만, 나는 최면을 통해 예전 기억의 "정화"를 경험했다. 따라서 나는 최면을 통해 우리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최면을 선택했다. 최면을 통해 나와 우리 그리고 인류는 내면의 고통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