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이면 찾아오는 인류 최고의 비극이자 최대의 난제, 월요일 출근.
아니, 집인데 벌써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요. 새벽까지 울며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몇시간 뒤 휴대폰 알람을 듣고 깨어났을 때, 왜그렇게 요며칠간 기분이 널뛰었는지 알 수 있었다. 대자연이 오셨다. 뻐근한 아랫배, 슬슬 고통이 시작되려고 한다. 배를 움켜쥐며 타이레놀 2알을 때려 넣었다. 또 한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노예들은 모두 눈을 뜨고 출근해주세요.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시 반이다. 여섯시에 집을 나서서 대중교통을 타고 1시간 10분 정도 이동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호선을 타고 계속 가기만 하면 되며, 그 시간에 타는 사람이 많지않아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책을 챙겨서 출퇴근 시간에 읽어볼까싶기도 하지만, 책을 펼치는 게 무섭게 바로 잠든다. 3월이지만 새벽 공기는 차다. 허겁지겁 지하철에 타서 자리에 앉으면 온열좌석이 따뜻한게 몸을 데펴줘서 금방 노곤해진다. 이런데서 소소하게 행복해지는게 싫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이렇게 가기 싫을 수가 있나.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표정의 동지들이 보인다. 체념해야지. 계속 그럴 수록 기분이 더욱 안좋아질 뿐이야. 받아들이자. 눈을 감고, 생각을 지운다. 마음 같아서는 좌석에 두발 뻗고 누워서 가면 딱일 것 같다. 그렇게 쏟아지는 졸음과 씨름을 하다보면 회사가 있는 OO역에 도착한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면 근처 산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새벽 바람이 이제 그만, 정신차리라고 귀때기를 때려온다. 옷깃을 여미며 시린 마음까지 추스리고 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회사는 7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한다. 아침부터 시간에 쫓기고, 마음이 초조한 것이 싫어 7시 10분 정도에 미리 도착한다. 먼저 와있는 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 자리에 착석한다. 지금부터 퇴근까지 버텨야 한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버티지. 심란해하며 컴퓨터를 켠다. 생각보다 오전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외부에서 발송해온 문건들을 편철하고, 필요한 추가 서류가 있으면 작성한다. 부장님이 전달해주는 일들을 처리하고, 비품 창고 수량도 체크하며 물품이 필요하다는 직원들을 챙겨준다. 점심을 부장님 및 부원들과 챙겨먹고 잠깐 햇살을 쬔 뒤 바로 자리로 복귀한다. 특히 점심 먹고 난 뒤엔 식곤증이 밀려오기 때문에 커피를 진하게 타먹는다. 세시간만 있으면 퇴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띠리리리.
좀처럼 울리지 않는 전화가 왔다. 급하게 핸드폰 액정을 확인한다.
그녀다. 일년에 한번씩 연락이 오는 그녀.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향한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응, OO아. 오랜만이다.
어리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렇다, 나의 직업은 교사이다. 정확히는 계약직 교사이다. 재계약이 되지 않는 한 보따리 장수처럼 짐을 싸고 이학교 저학교 유목생활을 하는 신세이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어언 4년이 지났지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낯설고 민망하다.
잘지내시지요? 저 서울에 올라와있어요.
ㅇㅇ대학교 ㅇㅇ공학과에 수시 합격해서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어요.
우와, 정말? 축하해. 잘될 줄 알았어.
평소와 다른 하이톤 목소리를 잔뜩 쥐어짠다. 그녀를 만난 건 내가 교단에 섰던 2020년 첫해이다. 파란만장한 내 교직생활은 전남 목포의 어느 중학교에서 시작하였는데 그 애는 우리반 반장이었다. 그때 그녀 나이 15살,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이렇게 커서 대학생이 되었다니, 그 말인 즉슨 나는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다. 그 애의 목소리엔 싱그러움이 베어나 참 잘자랐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나는 마음 한켠이 서러워졌다. 그녀는 못해도 2년에 한번씩 꼭 내게 연락을 해왔다. 고등학교를 근방의 국제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업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건강이 안좋다고 한 것이 마지막 연락이었다. 하지만 똑부러지고 야무진 그 애가 잘 될 줄은 진작 알아보았다. 마지막 통화에서 네가 대학에 합격해서 서울에 온다면 맛있는 걸 사주겠노라고, 통화를 하며 어른처럼 약속했었다. 사실 그때 나는 지난 학교에서 재계약이 불발되어 백조생활 중이었고, 우리집 김망치와 작은 공원에서 인생을 한탄하던 중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잔뜩 어른인 척 하며 전화를 끊고 현타가 왔던 기억이 났다.
선생님, 바쁘실텐데 여름방학 되면 한번 만나고 싶어요.
그래, 좋지. 맛있는 거 사줄게. 학교가 어디에 있다고?
우연인지 그녀의 학교는 나의 근무지와 무척 가까웠다. 합격을 너무 축하한다고, 네가 안되면 누가 되겠냐고, 앞으로도 잘 될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바가지로 넘치듯 퍼부어주었다. 하지만 어쩐지 내 목소리가 가볍고, 공허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더욱 대화를 쥐어짰다. 그녀는 그 뒤로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이야기, 학교의 여러 동아리들을 알게 되었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있고, 학과 미팅을 주선하기도 한다고 상기된 목소리로 전해왔다. 전화를 끊고 나는 그녀에게 신입생에 어울릴만한 유명브랜드의 립스틱을 선물하였다. 그 애가 나보다 더 나은 아이이고, 나보다 더 잘 될 것이었다. 지금 내가 그애보다 조금 더 나은 것은 돈을 좀 더 많이 번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유명브랜드 립스틱을 선택했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업무를 마저 하려는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4년 동안 뭘했지.
임용시험에 합격하지도 않았고,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사회적으로 봤을 때 나는 썩 성공한, 그래서 그 애가 멘토로 연락을 하며 귀감이 될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기억해주는 그 애에게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운 선생이었다. 선생님, 이라는 명칭이 부담스러운 이유도 같은 결이었다. 나는 내가 선생님, 교사로서의 자격이 있나 물음표를 던지는 때가 많다. 내가 썩, 잘난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교과목의 지식 외에 한 인간으로서 배움의 대상이 되나, 얘들이 날 보고 배울 게 있나.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윗층 선생님 한 분이 놀러오셨다. 그 분은 내게 살짝 목례를 하곤 뒷편 부장님 곁으로 갔다. 두 분은 학교에서 절친이라고 했다.
서ㅇㅇ 선생님, 대가족이더라. 장례식장에 자손들이 바글바글하더라고. 할머니가 가시는 길 외롭지는 않으시겠어.
맞다. 그 선생님 상 당했다고 했지. 잘 다녀왔어?
그러고보니 오늘 내 시간표에 국어 보강이 들어가있어 왜인가 했더니 서ㅇㅇ선생님이 할머니 상을 당했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요며칠 안오니까 심심해.
그 뒤로 몇마디 더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ㅇㅇ 선생님은 이십대 후반으로 재작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이 학교에 합격한 정교사이다. 얼굴도 예뻐서 인기가 많다. 한두번 스치며 인사한 경험이 있다. 마음에 난 작은 구멍으로 어쩐지 더 찬 바람들이 슝슝 불어오는 기분이다. 이상적인 삶이지 않은가. 가장 이쁠 때인 이십대 중후반에 안정된 직장에 당당하게 실력으로 합격해서 주변의 눈치보지 않고 연가도 쓰고, 자기 권리도 찾으면서, 주변에게 사랑도 받는 선생님의 모습. 저 선생님이야말로, 누군가의 멘토가 될 사람이지 않을까.
계약직 교사로서 가장 서글픈 순간이 몇몇 있는데 게 중 하나는 인간관계가 깊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떠날 사람이기에 내년, 내후년의 일을 기약할 때 언제나 열외이며, 연말에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내 짐을 싸야할 때, 함께 일년동안 동거동락했던 다른 정교사 선생님들은 새로 맡게 된 보직과 자리이동으로 약간의 상기된 상태로 이야기할 때면 그들과 내가 같을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언제나 떠나는 게 당연했던 사람으로서, 잠깐 자리를 비운 것 만으로 그리워해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그 선생님이 부러웠다. 너무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화면이 꺼진 검은색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이 비췄다. 난 선생님이 적합한 사람인걸까. 이런 열등감과 자존감 낮은 내게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교사로서 내 첫 부임지가 전남 목포였다고 하면 다들 묻는다. 그곳에 연고가 있냐고. 그런거 없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나는 교직에 늦게 뛰어들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얘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스물 일곱에 교육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2년 반동안 대학원을 다니며 학비로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다 까먹고, 페이가 제법 센 호텔 새벽 조식 팀 알바를 했다. 서른에 마침내 졸업을 했을때 동기들은 임용시험을 준비하겠다며 풀타임 고시생이 되었지만 나는 당장에 돈이 급했다.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을 얻었기에 서울에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경력도 없고, 학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 나는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사실 자기소개서 및 본인의 장단점, 교직 생활 등등을 써내라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주변에 이력서 봐줄 사람도 없던 나는 지금에 생각하면 무슨 자기 미화 소설 한편을 써서 가져가기도 했다. 당연히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3월 2일 개학날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한해를 이제는 학생도 아닌 백수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해졌고 급기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구의 교육청 구인구직 홈페이지를 매일같이 새로고침 조회하며 이력서를 돌린 것이다. 그 중 유일하게 연락 온 곳이 목포였다. 개학 일주일 전이었다.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 나에겐 교단에서의 경력이 너무나 절실했다. 사실 목포가 전라도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은 있어도, 내 나라 한국에서 자취를 해본 경험은 전무했다.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통학하며 엄마의 따순 밥을 먹으며, 부모님 집에서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일년 동안 목포에서 자취는 지금 생각해보면... 낭만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결정과 실행력을 보인 내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목포에 내려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집을 계약한 것이다. 직장과 가장 가까운 것이 장땡이라는 말에 학교 5분 거리의 빌라 원룸을 계약했다. 오래된 건물이였고, 부엌에 함께 있던 세탁기는 맨날 물이 넘쳐 골치 덩어리였지만 그 작은 살림방이 내겐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