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4일.
약간의 나른함이 공존하는 지금...
힘을 빼고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는 때...
내가 가야 할 길조차 명확하지 않지만, 하나씩 하나씩 해가다 보면 분명 나는 어딘가에서 서 있으리라!
실물로 된 것을 처음 손에 잡은 그것은, 승혜의 한 손보다도 크기가 작은 것이었다. 고급스럽게 은은한 메탈이 섞인 붉은 띠지가 위에 붙어 있다. 투명 OHP를 덮어둔 것 같은 깔끔한 커버 아래엔 귀여운 곰돌이 푸 캐릭터가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입체로 세워지는 형태인지 푸우 둘레에 칼집이 나 있다. 제 몸집만 한 하트 모양의 쿠션에 양팔을 기대고, 두 손은 턱받침을 한 채로 "왜? 뭐 줄까?"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는다. 예쁘네. 분홍분홍~ 사랑스러운 게 딱 엄마 스타일이야. 잘 어울려 엄마랑~ 빈 방에서 작은 수첩을 바라보며 자신이 소리 내 말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승혜다. 막상 열려니 긴장된 걸까?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표지를 들어 올린다. 그렇게 엄마의 손글씨로 쓰인 첫 번째 기록을 마주한다. 반가워 엄마. 자그마한 메모지 한 장에 자리한 작은 글씨를 보고 있노라니, 엄마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귀여운 푸우 그림이 가운데부터 시작해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쓰면서 고민을 하였을까? 아니다. 고민조차 안 하고 분명 푸우를 피해 나머지 자투리 공간을 찾아 글을 써 내려가셨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작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 하나에도 마음을 다했고, 배려를 전했던 고운 사람이었다. 여기에 이렇게 날짜가 적혀 있구나. 2021년 11월이라... 그때 나는 뭘 했을까? 그때 엄마는 어디서 무얼 하다 이 메모를 적은 걸까? 시간은 적혀있지 않다. 나른함이 공존한다는 걸 보면 점심 먹고 난 뒤쯤, 오후 2시나 3시 무렵이 아닐까? 힘을 빼고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는 말이 뭔가 담담한데 쓸쓸하고, 쓸쓸한데 다부진 느낌이다. 언제나 정답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던 엄마였는데. 엄마도 가야 할 길이 명확하지 않다 생각했구나. 엄마도 그랬구나... 그래서 엄마는 무얼 하셨을까요? 그래서 엄마는 어디에 서 있게 되셨을까요? 우리 엄마는 어느 곳에 다다르길 원했던 걸까? 그곳이 어디였든 눈 감기 전 닿았기를 늦게나마 바라는 승혜다.
하얗게 닫혀있던 엄마의 서랍을 처음 열었던 것은 열흘 전이었다. 노트북에서 발견했던 낯선 이름의 파일. 엄마의 노트북은 언제나 그랬듯 깔끔했다. 겉뿐만 아니라 속마저도 깔끔했다. 바탕화면에는 불필요한 아이콘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종류별로 폴더에 담겨 왼쪽면 세로 딱 한 열로 정리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가지런했다. 고개를 돌려 보이는 우측에는 상단에 딱 하나의 폴더만 있었다. "작가" 그래. 우리 엄마 작가였지. 나는 엄마의 글이 참 좋았다. 편안했다. 어렵게 읽히지 않았고, 진솔됨이 느껴졌고, 살아가는 지침이 되어주는 것만 같았다. 계발서뿐 아니라 엄마가 출간한 아동문학이나 청소년 문학 작품도 빠짐없이 읽었다. 중학교 때 처음 읽었던 그때부터 언제나 나는 엄마의 글을 사랑했다. 작가 폴더 아래에는 다시 여러 개의 폴더가 존재했다. 책의 가제목으로 나뉜 폴더 안에는 글이 담기고 있는 파일 하나와 목차가 정리된 파일, 시놉시스나 캐릭터 정리가 나열된 파일과, 자료들이 수집된 파일까지. 최소 4개의 파일이 어김없이 담겨 있었다. 출간을 완료한 책들을 모아둔 폴더도 있었다. 그렇게 마우스 휠을 내리고 내리다 마지막에 다다랐다. 왜 이 파일은 혼자 따로 있지? 모두 노란 파일철 모양 안에 옹기종기 모여 담겨 있는데, 혼자 한글 파일로 나와서 파랗게 색을 달리 한 것이 보인다. '여자의 기록' 제목이 뭔가 의미심장하다. 엄마의 일기장인가? 봐도.. 되나? 안 되는 거면 잠금 걸어 두셨겠지. 엄마, 저 이 파일 열어볼게요? 크게 소리치면 들릴지 모르니, 허락을 구했다 싶다. 찡긋 웃어 보이며 별 고민 없이 또독. 마우스를 눌러 파일을 연다.
이제는 하나씩 정리를 해 두어야겠다. 아무리 쓰는 게 일상이라지만 너무 여기저기 많은 곳에 흔적을 남겨두었다. 별로 좋지 않다. 혹여라도 내가 사라지면 정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수고로운가. 혹여라도 나 떠난 뒤, 나를 아끼는 이가 문득 한 장이라도, 한 문장이라도 발견하면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마음 아리겠는가. 그러지 말아야지. 그런 마음이 앞서 보이는 대로 모아보았다. 몇 시간 집을 돌고 나니, 어느새 커다란 책상 서랍 한 곳이 가득 채워진다. 많기도 하구나. 언제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틈날 때마다 정리를 해야겠다. 그대로 버려도 좋을 문장들은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어떤 의미로라도 남기고 픈 내용들을 이곳에 정리해야지. 지나버린 나의 기록.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그 여자의 기록을 지금부터 천천히 받아 적어 보자.
대체 이 파일을 처음 쓰기 시작한 건 언제일까? 이렇게 내 곁을 떠날 걸 알고라도 계셨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 책상 서랍이라는 글귀를 보자마자 승혜는 엄마의 책상 서랍부터 열어 보았다. 가득 채워졌다는 서랍은 제법 많이 비워져 있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수첩들. 아! 엄마다... 그렇게 열흘 전 승혜는 엄마의 기록이 담긴 한글파일을 처음 열었고, 하얗디 하얀 그 서랍을 처음 열었더랬다. 지난 열흘동안은 엄마가 정리해서 파일에 담아 둔 글들을 읽었다. 처음엔 너무도 엄마가 그리워 보고 또 봤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 없이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터져 나오면 펑펑 울었다. 힘이 생기면 다시 또 읽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너무 빠르게 읽었나...? 경솔했던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7일 차부터는 부러 하루에 하나씩만,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읽었던 승혜다.
아침부터 새소리가 참 많이 들렸다. 유난히 햇살이 따스했고, 유난히 새로 자란 잔디가 예뻤다. 엄마가 좋아했을 풍경. 그러고 보니 잔디도 이제 나 혼자 깎아야 하는구나. 생각이 닿으니 괜스레 쓸쓸하고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자연스레 엄마 방으로 들어와 하얀 책상에 앉았다. 오늘은 노트북이 아닌 서랍을 연다. 열흘 만에 열어보는 서랍. 그렇게 곰돌이 푸 메모책을 꺼낸 것이다. 엄마의 글씨를 어루만져본다. 짧지만 짙은 글을 읽고 또 읽는다. 엄마의 글자 하나하나를 다시 살펴본다. 오래 봐서 그런지 특정 글자들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착시효과가 생겨난다. 유독 '하나씩 하나씩'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입체로 보인다. 하나씩 하나씩. 이 날 우리 엄마, 조금은 힘겨웠던 게 아닐까?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도 없이 걸어 나가는 그 길에서, 조금은 지쳐있었던 것일까? 나의 엄마도. 힘에 겨워 잠시 멈추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래. 나도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만 해 보지 뭐. 많이 하지 말고, 하나씩만 하자. 뭐든 하루에 하나씩만. 그러면 어디든 나도 서 있겠지.
엄마의 메모는 곰돌이 푸의 발아래에도 있었다. 위의 메모와는 완전 다른, 쓰고 있던 책에 대한 아이디어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책에 대한 기록이었다. 좀 더 머무르지 그러셨어요. 조금 더 쉬었다 하시지. 나른함을 좀 더 즐겨보지 그랬어, 엄마. 다 괜찮은데. 우리 엄마, 그래도 되는데 말이야. 가로든 세로든 폭이 10cm도 안 되는 이 작은 공간만 봐도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며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사이 많은 생각들이 스쳐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첩을 덮기 전 뒷부분을 추루룩 넘겨 보았다. 어? 한 장이야? 이거 한 장이 전부라고? 그냥 지나쳤나 싶어 아까보다는 좀 더 천천히 한 장씩 훑어본다. 없다. 푸 메모지에는 딱 한 장의 메모가 전부였다. 너무 예뻐서 아까우셨나? 귀여운 우리 엄마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다. 덮었던 표지를 다시 연다. 노트북을 켠다. 여자의 기록. 홀로 남아 있는 파일을 또독. 다시 연다.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들도 지나, 맨 뒤로 커서를 옮긴다. 그리고 오늘의 메모를 이어 적는다. 엄마의 기록에 이어가려니 다짐이 필요했을까? 자판에 손을 올린 승혜는 한참을 머무른다. 그리고 창 밖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크게 숨을 마셨다 내쉰다. 이내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엄마가 그랬듯. 엄마의 메모를 받아 적는다. 그리고 그 아래. 승혜의 이야기를, 아니, 생각들을 적어본다. 엄마와의 글 속 데이트~ 좋은데? 고마워 엄마. 나를 위한 기록을 남겨줘서! 내가 뭐라도 하게 해 줘서, 고마워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