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장의 생활 메모가 이어졌다. 상수도 요금 납부, 쓰레기 분리수거, 카드 해지, 안마의자 수리 전화 등 종목은 다양했다. 슈퍼에서 사야 하는 물건이 기록되기도 했고, 잔디 깎기나 텃밭 물 주기와 같은 내용도 있었다.
“글을 쓰다 보면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일상생활을 잊어버릴 때가 많아. 한때는 치매 걸리면 어쩌나 고민도 했었는데, 가만 보니 내가 살기 위해서 그러는 거더라고. 그 많은 걸 다 담고 기억하고 있으면 어찌 살겠어. 엄마도 사람이니까. (웃음) 그리 생각했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더라고. 그때부터였지. 비워내는 내 능력에 감사하며, 기록하기 시작한 게. 몇몇 일들은 내가 잊으면 곤란해지니까. 그래서 자꾸 적어두는 거야. 운 좋게 보게 되면 그때라도 하라고.”
언젠가 엄마는 내게 웃어 보이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웃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수첩을 바라보던 승혜의 얼굴에 미소가 보인다. 그렇게 몇 장을 후루룩 넘겼다. 대부분 한 줄로 그어져 있는, 할 일들과 한 일들에 대한 기록들이 몇 장이나 지났을까? 오랜만에 엄마의 기록이 나타났다.
엄마, 난 그런 성향이에요.
상상의 나래. 꿈을 꾼다.
일정한 루틴, 반복, 편안함...
새로운,, 도전,, 열정,,
갑자기 나타난 기록이라 당황스러움이 있었는데, 날짜도 없는 짧은 네 줄의 기록에 승혜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의미일까? 언제인 걸까? 엄마의 말일까? 내가 엄마에게 던진 말일까? 모르겠다. 도통 모르겠어...
엄마, 난 그런 성향이에요.
설마 내가 엄마에게 한 말은 아니겠지? 승혜를 멈추게 한 첫 문장은 볼수록, 생각할수록 신비한 힘이 있었다. 만일 저 말이 승혜 자신이 엄마에게 던진 말이라면?이라는 생각은 한 문장을 너무도 마음 아프게 만들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가 얼마나 상처받으셨을까? 분명 혼자 적으며 울었을 거야. 그런 생각에 닿으니 싫었다.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이 가득 차 승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모르겠다. 너무 쉽게 엄마에게 상처의 말을 던진 적이 있으면 어쩌지? 무서웠다.
만약 엄마의 이야기라면? 엄마가 할머니를 생각하며 적은 거라면? 그건 오히려 마음이 편하네. 우리 엄마와는 참 달랐던 우리 엄마의 엄마, 할머니. 엄마는 나를 참 많이 이해해 주었다. 믿음으로 응원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을 그냥 두었던 엄마였다. 그러했기에 난 많은 도전을 할 수 있었고, 뭐든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실패의 순간에도 오래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엄마는 그러지 못하셨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고, 엄마를 가만두지 않으셨다. 언젠가 엄마가 글 쓰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던 적이 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참 자유로워 보였던 우리 엄마.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혼자가 되는구나! 를 느꼈던 것 같다. 그 이후 나는 엄마가 글 쓰러 들어가시면 웬만하면 방해하지 않았다. 내게도 생각이라는 것이 생긴 이후로는 엄마가 적어도 글 쓰는 그 순간만큼은 자유롭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런 엄마였기에, 본인의 말로 본인의 엄마에게 저런 말을 내뱉었기를, 메모로라도 적어본 것이기를 늦었지만 바랐는지 모르겠다.
엄마, 난 그런 성향이에요.
상상의 나래. 꿈을 꾼다.
일정한 루틴, 반복, 편안함...
새로운,, 도전,, 열정,,
한참의 생각이 지나고 나니 고요해진다. 네 줄의 메모를 읽고 또 읽어 본다. 소리 내어도 읽어 본다. 그렇게 엄마의 기록을 읽다 보니 생각이 하나 둘 사라진다. 잡다한 염려도, 무의미한 추측도 없어진다. 왜지? 기분이 좋아진다. 승혜는 생각을 비우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글자를 바라보니 마음 가득 긍정의 기운이 채워지는 걸 느낀다. 우리 엄마, 이 메모 적을 때, 행복했구나! 비로소 느껴지는 엄마의 마음에 활짝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