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벽

<2부. 인정하면 비로소 보인다 6>

by 하늘꽃

오래 다니던 직장을 떠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더군다나 돌보고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의 벽'이라고 표현한다. 내 안에서 자꾸만 말을 거는 자아와 그러면 안 된다고 나를 막아서는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게 일상이었던 나에게 그 벽은 참 크게 느껴지곤 했다. '나는 할 수 있어! 그러니 더 늦기 전에 해 보자!'라고 결심했다가도, 끝임 없이 펼쳐지는 현실의 어려움과 급박함에 멈춰 서곤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의 또 다른 자아는 방심하고 있던 내게 한없이 날카롭고 차가운 질문을 던졌다.

“이래도 맘대로 할 거야? 그러면 이 일들은 다 어떻게 해결할 건데? 어떻게 할 거냐고! 돈은 있어?”

그렇게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차디찬 현실에 베이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렇게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되겠다 싶었다. 뭐가 문제인지 정리라는 걸 좀 해 보자 생각했다. 대충 회피하지 말고, 직접 마주하겠다 마음먹었다. 써 보았다. 돈이 문제라면, 내가 갚아야 할 빚은 얼마인지,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내가 아이들과 생활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은 얼마인지, 내가 교사를 그만두면 얼마를 해결하고,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내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얼핏 보면 끝없어 보이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단순히 머릿속만 어지럽히고 긍정적 결과물은 하나도 없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때그때 하나, 둘 적으며 해결 방법을 찾았다. 적다 이상하면 다시 처음부터 적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막상 큰 일은 아니구나 싶다. 우리 셋 편하게 누워서 쉬고, 잘 곳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거면 충분하지. 나머지는 무얼 해서든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불필요한 것들을 지우니, 생각보다 우리 셋이 사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도 보였다. 현실이 벽인 줄 알았더니, 내 걱정과 내 염려가 벽이었다. 의미 없는 내 욕심이 또 다른 장벽을 쌓고 있었다. 내가 교사로 남아있다고 해서 채워질 욕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내가 현재의 직장에 남아있을 때와 그만두고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갈 때 경제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적다 보니 속담이 하나 생각났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내가 현재의 직장에 남아 있을 때 어울리는 속담이라 생각되었다. 실제로 그랬다. 나는 남들이 보기에 안정된 곳에서, 적당한 수입과 열정적 노력으로 더한 부가 수입을, 적당한 사치와 쉬지 않는 소비로 탕진하고 있었다. 소위 '보상 심리'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해서 말이다. 이러다 보면 인식도 못한 채 진짜 가랑이가 찢어질지 모르겠네 싶었다. 그렇다면 황새가 뱁새를 따라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답답하겠지. 불편할 것이다. 이 또한 현재의 나에게 참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넘쳐나는 나였지만, 이것저것 제약이 참 많은 ‘교사’라는 직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발작 발을 떼어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랬기에 답답했고, 그렇기에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아프기까지 했다. 결국 남아있으면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겠네 싶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잘 돌아간다. 나 하나 직장에서 나온다고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나와 나의 소중한 가족들도 생각보다 강하다. 나의 딸들은 변화로 인해 생기는 조금의 불편함에 투정 부리기보다는, 엄마의 꿈을 기쁘게 응원하고 축하해 줄 만큼 예쁘게 자랐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아직 젊고, 무궁무진한 능력이 있다. 내가 교사를 그만둔다고 부모님께서 당장 쓰러지실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든 또 살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 부모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마흔. 지금까지 산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많다고 믿고 살아야지 싶다. 현실의 벽 따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다는 게 보여버렸다. 지구는 네모가 아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끝없는 절벽으로 떨어져 죽지 않는다.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과 염려를 없애니 편안해졌다. 편안해지니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였다. 아! 때가 왔구나. 이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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