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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앞에 두고 고군분투하는 초등 아들

절제와 유혹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초등 5학년 아들

by 여포아내

한별이와 할아버지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 집에 가기 전에는 한별이에게 늘 하는 당부가 있어요.

" 한별아~ 할아버지 집에 가면 할아버지를 많이 따라다녀. 할아버지는 지혜가 아주 많으신 분이야.

할아버지가 TV 보실땐 너도 옆에서 같이 보고, 마당에 나가시면 너도 따라 나가 "

" 내가 따라다녀도 할아버지는 말을 거의 안 하시는데? "

" 할아버지가 말이 없으시긴하지. 그래도 할아버지가 뭐 하시나~ 따라다니면서 봐

그러면 손자가 따라다니니 할아버지 기분도 좋아지시고 너는 또 할아버지의 지혜를 배우게 되지 "

" 네~ "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고 한별이도 대답을 잘 하지만

한별이는 아직 어린이잖아요.

할아버지 집에 도착하면 인사만 드리고서는 냅다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쏙 들어갑니다.

아직 어린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오늘 할아버지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이 당부는 계속됩니다.





" 엄마, 나 이번에 할아버지 집에 가면 컴퓨터 게임 안 할게.

엄마가 아예 키보드랑 마우스를 치우세요! 나 착하지? "

" 오잉 정말? "


사실 한별이도 할아버지네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후회를 하거든요.

컴퓨터를 너무 많이 한 것을 후회회고 할아버지를 안 따라다닌 것을 아쉬워했어요.

그러더니 오늘은 도착 전부터 그러지 않기로 아예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봐요!



할아버지 댁에 도착하자마자 이번엔 제가 곧장 컴퓨터 방에 가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이불채 사이사이에 깊숙이 밀어 넣어두었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한별이는 휑한 컴퓨터 책상 위를 바라보며 못내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입니다.

" 엄마 키보드 진짜로 치웠어? "

" 응 네가 말했잖아. 자 이제 나가서 할아버지를 따라다니자~ "


한별이와 함께 할아버지가 계신 마당에 나와 함께 있는데

어느샌가 한별이는 집안으로 들어가 사라졌습니다.



한참 후에 집안에 들어가 보니

한별이는 컴퓨터 책상에 앉아 마우스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 엄마! 나 마우스 찾았다~ 키보드는 못 찾았지만 마우스는 찾아서 컴퓨터 하고 있었다~ "

" 윽, 이런! "

여분 마우스가 있었거든요.


그날 저녁




자려고 누웠을 때 한별이가 엄마를 향하여 몸을 돌리고 조용히 말 합니다.


" 엄마, 아까 내가 게임 못하게 한 거 잘했어요.

근데 마우스는 찾아서 내가 게임은 못했지만 유튜브는 많이 봤어.

그니까 내일은 엄마가 아예 컴퓨터 전원 코드를 숨겨놔. 알았죠? "

" 응 그럴게 "


한별이도 오랜만에 게임을 안 하겠다는 의지를 발했는데 결국은 컴퓨터를 해서

자기도 못내 아쉬움이 남았나봐요.

알았어. 내일은 너를 꼭 잘 지켜줄게!



그래서 아침 일어나자마자 전원 코드선을 숨겨두었습니다.

한별이 역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전원을 켜 보지만 코드선이 없는 것을 보고는 무척 아쉬워합니다.


" 엄마~ 진짜 전원선 숨겨놓은 거야? "

" 엄마 어제는 내가 판단을 잘못한 거야. 다시 코드선 주세요~

어제도 내가 한 말을 엄마가 듣고 코드선 뺐지요?

오늘도 내가 한 말이니까 제 말을 듣고 코드선을 다시 주세요~ "


한별이는 아침이 되자마자 금방 마음이 바뀌었나봅니다.


" 한별아 너 결초보은 뜻 알지 "

" 결초보은? 그거 은혜 갚는다는 거 아니에요 "

" 맞아. 그게 왜 은혜를 갚은 거야?

그 아버지가 정신이 멀쩡할 때는 첩을 개가 시키라고 했다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첩도 같이 죽이라고 했는데

그 아들이 첩을 안 죽이고 개가 시켜준 것이 고마워서 은혜를 갚은 거잖아 "

" 그런데요? "

" 그 아들도 아버지가 맑은 정신일 때 한 말을 따른 거지?

나도 네가 어젯밤 맑은 정신일 때 한 말을 들어야지.

너는 지금 컴퓨터가 눈앞에 보여서 정신을 못 차리고 전원선 달라고 하는 말인데 그 말을 들으면 안 되지 "

" 아... 안 돼~~~ "


" 한별아 네가 지금은 무척 아쉬워도

이따 집에 갈 때는 또 '엄마, 아까 나 말려줘서 고마워요' 라고 말할 것을 믿어 "

" 우엥~ "




이 날 저녁에 한별이도 일기를 썼습니다.

한별이는 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네요.


" 결국 난 게임을 못 했지만 엄마가 잘한 거다. 그래도 다음에는 그런 말은 함부로 안 해야지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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