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를 만나기 위한 선물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지 6년이 지났다. 지금은 오롯이 남편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전업주부다. 결혼 후 30여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나는 사업 소득으로, 남편은 근로 소득으로 힘을 합하여 땡전 한 푼 없는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늘려나갔다. 불어나는 통장의 잔액을 보며 그만하면 평탄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행복에 겨워했다. 행운의 여신이 항상 지켜주는 듯 안온한 생활이 이어졌다.
붙잡고 있던 것들이 손에서 빠져나가듯, 삶은 롤러코스터 급강하처럼 한순간에 아래로 기울었다. 주머니는 털어봤자 먼지만 폴폴 날리던 시절, 태산처럼 높은 빚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비켜갈 만한 지름길 하나 보이지 않았을 때 남편과 나는 당당히 그 산을 넘어보리라 마음먹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가 아니던가.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고, 미끄러질 땐 서로 밀고 당겨주며 빚을 갚아온 세월이 어느새 14년이 지났다.
그동안 숨통을 조여오던 빚도 다 갚고 대출 내어 마련한 전세 보증금도 다 갚았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세월은 우리 부부에게 후련함을 선물해 주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가진 거 하나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이니 힘든 일이 닥쳐도 시간이 걸릴 뿐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이겨냈다.
남편의 새 화물차 '누리'가 3월 3일, 우리 집에 온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돈을 한 곳으로 정리하던 남편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금펀드라서 그런지 수수료를 16.5%나 뗀다고 하네."
연금으로 받으라고 세금 혜택을 준 돈이라, 중도에 찾으면 그 혜택을 돌려내는 개념으로 16.5%의 세금이 붙는다고 했다. 남편이 적금한 돈과 펀드를 팔면 나올 금액이 2000만 원이었는데 갑자기 1000만 원이 모자라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번에 팔지 않기로 했던 금이 떠올라 내가 말했다.
"어머니 쌍가락지만 간직하고 내 귀금속은 다 팔자. 펀드는 나중에 노후자금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
모아둔 금붙이들을 들고 미리 알아둔 금거래소로 갔다.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고 싶은 마음에 18K 반지만 손가락에 끼웠다.
"20~30년 전 귀금속이 많으시네요."
거래소 사장님은 14K, 18K, 백금, 순금으로 분류하고 무게를 잰 다음 가격을 책정해 주었다. 모두 합하면 680만 원이라는 큰돈이었다. 나는 현금으로 달라고 하였다. 요즘 모두 무통장으로 이체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에게 돈다발을 직접 선물하고 싶었다. 남편 입이 떡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금인출기에 들러서 현금 100만 원을 찾았다. 전업주부가 알바를 하지 않는 이상 돈을 벌기란 쉽지 않다. 그 돈은 글로소득, 글을 써서 번 돈이다. 지난해 8월부터 공모전 상금과 <오마이뉴스> 원고료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돈이 얼추 100만 원이 되었다. 글로소득은 남편이 연달아 며칠 쉬는 날이 있으면 여행 경비하려고 모아둔 비상금이다. 남편이 화물차를 사는 데 보태는 것이 지금으로서 가장 현명한 생각이 들었다.
만기 된 적금과 금을 판 돈, 글로소득을 합하니 총 1780만 원이었다. 그중 적금 1000만 원은 이미 계좌로 이체했고, 현금 780만 원을 가방에 고이 싸서 들고 집으로 왔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기야, 빨리 나와 봐. 이것 좀 봐."
오만 원권과 만 원권 뭉치를 식탁 위에 '턱'하니 올려놓고 소리쳤다. 남편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680만 원은 금을 판 값이고, 100만 원은 나의 글로소득이야. 자기 차 사는 데 보태면 좋겠어."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그리고 또 열심히 돈 벌어줄게요."
가방에 돈을 불룩하게 넣고는 나에게 배꼽인사를 하였다. 얼마나 좋았으면 높임말까지 써가며 갖은 아양을 떨어대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아마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감성쟁이 남편은 분명 눈물을 흘렸을 게 뻔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해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비록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이지만 남편이 꼭 필요할 때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돈은 또 모으면 되고, 글로소득은 계속 글을 쓰면 될 것이며, 금은 반지 하나면 족하다. 무엇보다 앞으로 10년 이상을 가장으로서 누리와 함께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다. 노후 보험, 이만하면 충분히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