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서 쥐를 봤던 그날 이후,
불길하다고 느꼈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First와 Distinction으로
서류 통과율은 분명히 눈에 띄게 올랐다.
하지만 마지막 문턱,
Assessment Day에
나를 초대해준 곳은 거의 없었다.
합격 여부조차 말해주지 않는 곳이
스무 군데가 넘었다.
작년, 재작년과 똑같은 결과가
반복되는 것 같았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모든 걸 접고 돌아가야 하나
LLB First, LPC Distinction.
3년을 그 한 줄을 넣기 위해 살아왔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말 최선을 다했다.
멘토가 된 어느 파트너 변호사는
비자 이슈와 함께 조심스럽게
‘나이’가 걸림돌이라 말한다.
고등학교 졸업연도만 봐도 나이가 드러나고,
십여 년의 커리어는 ‘신입’으로 받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박사과정과
교수로의 진로를 권유했다.
다양성과 포용을 말하는 로펌들이
나이에 핸디캡을 둘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나를 증명하려 애썼지만,
점점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두 곳의 대형 로펌에서
여름 인턴십 프로그램 최종 면접까지 갔다.
통과하면 2주간 여름 인턴을 하고,
최종 합격으로 이어지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그 인턴 기간에도 절반은 떨어진다지만
그래도, 이번엔…
정말 될 줄 알았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전화는 오지 않은채
해가 저물었다.
결국 다음 날 받은 메일엔
익숙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We are sorry to say...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번에도 나라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 같았다.
케이스 스터디도, 인터뷰도 최선을 다했는데.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이번엔 다를 줄 알았기에.
그날 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에게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이만큼 성적을 받았는데도 안 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너무 부끄러웠다.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새벽.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었다.
벼랑 끝에 서있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버텼던 마음이 무너지고,
한 발만 더 나아가면
모든 걸 끝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이 지나고 해가 뜰 무렵,
다행스럽게 이대로 끝내기엔
지금까지의 내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나 자신이,
지금까지 나를 응원해준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포기한 많은 것들이,
너무 아깝고,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다시,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다른 길이 있다면,
한 번 더 가보자는 마음으로.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너무 부끄러웠던,
내 인생 가장 어두웠던 어느 새벽의 기록이다.
이 고백이 누군가의 어두운 새벽에
작은 등불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