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한 사나이와의 추억을 회고함

by 정건우


박사 / 정건우


무작정 강릉행 첫차를 탔다. 방황하던 스무 살의 나는 어디론가로 숨어들고 싶었다. 동네 이발소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던 중 “명주군 성산면 오봉리”라는 지명을 외웠다. 거기서 대규모 물막이 공사를 하는데, 인부가 부족해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네댓 달은 더 해야 한다며 아무래도 준공에 차질이 있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스포츠 가방에 간단한 옷가지와 책 몇 권, 세면도구 등을 챙겼다. 포항에서 강릉까지 다섯 시간 이상 걸린다고 하니 일찌감치 서둘렀다. 81년 삼월 초, 초행길의 날씨는 간간이 추웠다.



공사 현장은 한 눈에도 황량했다. 왼쪽 산은 정상까지 허물어져 절개지가 훤하게 드러나 있었고, 오른쪽으로 한 이십여 호쯤 될까?. 소똥처럼 흩어진 작은 마을의 지붕 위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가 마을 입구에 서자, 백 미터 전방에서 우비를 입은 초로의 남자가 다가와 내게 우산을 건넨다. 그리고 가방을 낚아채고는 앞서 걷는 것이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공치는 날이네, 어디서 오는 길이신가?”. 포항에서 온다고 했더니

“포항?” 하고 크게 되물으며 남자가 멈칫 서더니, 몸을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곤 다시 걸었다.

“일단 내가 묵는 숙소에 방을 잡지” 그는 숙소 아주머니와 몇 마디 누고 자신이 묵는 옆방을 배정해 주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하던 차에 빵 한 개를 건네며 그가 먹으란다.

“난 여기 공사판 십장인데, 사람들은 나를 박사라고 하네” 하며 그가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가방 들고 여기 오는 사람이면 뻔한 게 아닌가?. 참 멀리서도 왔네.



일은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할 일은 콘크리트 타설을 돕는 것이었다. 박사 팀이 맡은 공사는 수로를 만드는 일이라 했다. 산 중간 경사로부터 아래로 콘크리트를 치는 일이다. 대형 믹서기로 섞은 콘크리트를 밑으로 쏟으면, 이동 수레로 그걸 배분하여 필요한 곳으로 운반하는 작업이다. 몹시 고되어 금방 땀에 흠뻑 젖을 만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노동이었지만, 일체의 잡념이 스며들지 않는 그 빡빡함이 나는 좋았다. 오십 명 가까운 인부들을 박사는 때로 얼르고, 욕지거리로 제압하고, 말없는 눈빛과 손짓으로 상대하며 일을 감독하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와 숱이 많은 눈썹의 샌님 같은 인상의 그에게 인부들이 박사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두 달 만에 나는 눈썰미 좋은 총각 일꾼으로 칭찬받으며 현장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리고 틈틈이 주인댁 초등학생 오누이에게 산수를 가르쳐 성적을 크게 올려주었다. 더운 저녁엔 박사와 함께 마을 앞 냇가에서 덜덜 떨며 멱도 감았다, 그와 물레방아 난간에 앉아 소주를 홀짝대며 소쩍새 우는 소리도 듣곤 하였다. 그에 대해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도 내 신상을 알려하지 않았다. 그저 공구와 기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는 공대 휴학생이거나, 진학 예정자쯤 되는 아들뻘로 여기며 편히 대해주는 눈치였다. 공치는 날이면 그는 늘 출타하여 밤늦게 돌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취해있었고, 포켓용 하야비치 보드카 한 병과 반건조 오징어를 건네주곤 하였다. 그런 그가 왠지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비밀이 많은 신비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공무를 보던 기사가 그만둬 그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물론 박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졸지에 현장 사무실 기술자가 된 것이다. 임금도 기존 보다 30%나 더 준단다. 공구 출납과 파손된 기계 부품을 도면화하여 구매 의뢰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만능제도기에 앉아 도면 그리는 일은 내겐 쉽고 평이한 일이었지만, 박사나 기타 일꾼들은 내가 그 일을 해낸다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착암기에 소요되는 브레이커 부품은 특성상 자주 파손 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신속하게 도면을 그려 강릉 시내까지 직접 나가 철공소에서 만들어 돌아오곤 했다. 내가 만든 부품이 기존 것보다 더 낫다는 평도 받았다. 학교 실습 조교를 할 때 금속실과 끊임없이 교류하던 효과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 박사와 건설사 대표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내가 맡은 일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정체가 몸시도 궁금해져만 갔다. 박사는 나를 전적으로 신임하는 듯했다.



일이 막바지에 이르던 어느 저녁, 박사는 강릉 시내의 한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갔다. 유럽풍 실내 장식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마치 프랑스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를 꾸민 곳이었다. 카페 마담과 매우 친해 보였던 박사는 내게 “슬로 진”을 권하였다. 그렇게 박사와 나는 “진토닉” 과 “슬로 진” 과 드립 커피를 번갈아 마셨다. 그리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샹송과 포르투갈의 파두와 프로콜 하럼의 바로코록을 이야기하였다. 나야 원체 이런 음악에 익숙해 있었지만 비교적 연로한 박사가 팝에 해박한 것이 무척 놀라웠다. 박사가 혹시 음악가가 아니었을까 하여 취한 척하며 물어볼 뻔하였다. 도대체 이 분은 모르는 것이 무얼까?. 오늘따라 많이 취한 그가 뜻밖에도 미국 팝 그룹 이글스의 기타리스트 “돈 펠더” 이야기를 힘주어하는 것이었다. 팀리더에게 왕따를 당해 '호텔캘리포니아'를 주도적으로 작곡한 그의 공로마저 형편없게 평가 절하된 채 방랑하는 그의 인생이 불쌍하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처지가 그를 쏙 빼닮았다는 듯이 깊게 한탄하는 모습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카페를 나오기 전에 주소가 적힌 메모 한 장을 내게 주며 혹시 일이 끝나고 내려갈 때 들러줄 수 있겠냐고 그가 물었다. 많이 취한 상태였다.



칠월 중순에 나는 다시 포항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흔들리던 마음은 그새 진정이 되었고, 열심히 한 보람과 박사가 덤으로 더 챙겨준 임금으로 주머니도 비교적 두둑하였다. 나는 주소를 들고 영천버스 터미널에서 가깝다는 과수원을 찾아갔다. 늦은 오후의 과수원은 마침 복숭아 수확 시기여서 그런지 나무마다 탐스러운 복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장관이었다. 입구부터 풍기는 상큼한 복숭아 향기가 온 과수원에 안개처럼 자욱하였다. 모녀로 보이는 두 여인에게 박사의 필체를 보이며 그의 안부를 전하자 별안간 모녀가 서로의 손을 붙들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뜻밖의 광경에 조금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자 손바닥으로 대충 눈물을 훔친 부인이 소원이니 하룻밤 묵어가라고 간청을 하는 것이다. 나보다 연배로 보이는 딸도 애원하듯이 매달렸다. 도저히 박절하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하룻밤을 과수원에서 묵게 되었다.



아주 정성스럽게 모녀는 저녁 밥상을 차려주었다. 새 면도기와 세면도구, 여름 잠옷까지 준비해 챙겨주었다. 나는 그만 감격하여 하마터면 박사의 소재지를 말할 뻔하였다. 예상 대로 모녀는 박사의 부인과 딸이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간절한 표정으로 박사의 소재지를 물었으나 나의 완고한 태도에 더는 묻지 않았다. 박사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했기 때문에 나는 냉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건강하게 잘 있다니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부인이 울면서 손을 모았다.

“조만간 반드시 내려오신답니다. 걱정하지 마시랍니다”나는 몇 번째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부인은 나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딸이 애써 말리는 눈치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딸이 간식거리를 들고 잠시 다녀갔다. 박사는 서울의 모 대학교 교수였다는 것이다. 시국과 관련한 사건으로 교수들 간에 오해를 받아 수배령 속에서 저렇게 떠돌게 된 지가 몇 년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동안은 아주 가끔씩 소액환으로 약간의 돈을 보내와 자신의 무고를 알렸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아버지의 친필을 들고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단다. 아버지를 만난 듯이 반갑고 또 고맙다며 딸은 끝내 오열하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기침으로 애써 눌렀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녀가 나가고 나는 잠시 울었다. 박사와 그의 가족이 처한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몹시도 안타깝고 화가 났다. 장시간 차에 시달리고 긴장으로 몹시 피곤했지만, 새벽으로 갈수록 내 정신은 더욱 말짱하게 깨어나는 것이었다. 오해와 그 반목이 날린 칼에 베인 한 명의 선량과, 그 가족이 흘린 피가 낭자한 현장에 내가 누워 있다는 생각을 하니, 치미는 억울함과 분노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뜬 눈으로 일어나 정성껏 차린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양손에 포장된 복숭아를 잔뜩 들고 나는 포항행 버스에 올랐다. 손 흔들던 모녀가 터미널 귀퉁이에 오롯이 서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