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역마살이 산다
우리 가족에게는 병원에서 잡히지 않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그걸 '역마살 DNA'라고 부른다.
지금 이 삶에 딱히 불만은 없다. 그런데도 가끔 "재미없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고, "뭔가 미친 짓 하나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든다.
가만히 있는 게 불편하고, 낯선 곳에 마음이 끌리는 습관 같은 성향. 남편도, 딸도, 이 역마살DNA를 공유한다. 특히반복되는 일상에 쉽게 실증을 느끼는 모습은 그 둘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요즘 우리 딸이 그렇다.
지금 우릴 대신해 빼꼼이를 돌보고 있다. 퇴근 후엔 빼꼼이를 산책시키며 노는 시간이 좋다고 웃지만, 가끔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으면, "요즘 취미도 그냥 시간 때우기 같아"라며 한숨을 쉰다.
회사 제품 개발 팀장으로 잘 나가고 있지만, 딸의 회사는 이제 성장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예전처럼 모든 순간이 긴박하고 도전적이었던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는딸이 덜 신경 써도 될 만큼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안정감 속에서 딸은 오히려 자극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불쑥 말한다. "그냥, 뭔가 확 다른 걸 해보고 싶어. 이를테면, 스페인에서 살아보거나, 낯선 곳에서 살아보는 거."
그 말을 듣던 남편이 피식 웃는다. "그건 내가 젊었을 때 맨날 하던 생각인데."그는 반복되는 일상에 늘 실증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후 배낭 하나 메고 미국을 떠돌았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아래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따라 히치하이킹을 하던 날들. 그 당시 유행했던 맥가이버 머리를 휘날리며 그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 여정 끝에 유학을 결심했고, 친구를 통해 우연히 나를 만났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지 못했기에 그는 나를 만났고, 우리는 가족이 되었으며, 지금 이곳까지 함께 왔다.
딸의 말을 곱씹으며 나는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이런 고민들… 혹시 사치일까?'
먹고살기 바빴던 시절엔 '취미가 시간 때우기'라는 투정조차 사치 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미친 짓을 해보고 싶다'는 말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다.하지만 곧 다른 감정이 스며들었다.
삶이 평온해졌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안을 들여다본다.그건 사치가 아니라, 다음 삶의 문을 열기 위한 신호다. 안정은 겉으론 평화롭지만, 그 안엔 늘 조용한 떨림이 자라고있다.
딸이 느끼는 그 감정, 자극이 없으면 찾아오는 그 갈망이 바로 그것 아닐까? 회사에서 안정기를 맞으며 반복되는 일상에 실증을 느끼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딸의 모습은 어쩌면 그 떨림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건 불만도, 욕심도 아니다. 삶에 질문을 던지는 용기다. 남편도 그 질문을 따라 살았다. 그 질문 끝에 인연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 습관 같은 갈망이 그를 낯선 도시로, 그리고 내 곁으로 이끌었다.
이제 딸도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겠지. 스페인의 햇살 아래 플라멩코 음악을 들으며, 혹은 낯선 도시의 좁은 골목에서 자신만의 또 다른 답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향하든, 나는 응원한다.
어쩌면 우리 집의 역마살은, 세상을 떠도는 마음이 아니라,삶을 끝까지 궁금해하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자극이 부족할 때마다 찾아오는 그 떨림, 그것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반복되는 일상에 실증을 느끼는 그 순간들이야말로 우리를 새로운 문으로 이끄는 열쇠다.
우리 부부는 한국 여행이 끝나면 딸과 빼꼼이를 다시 만나 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빼꼼이를 먼저 충분히 이뻐해 준뒤, 딸이 꿈꾸는 새로운 자극에 대해 깊이 이야기해보고 싶다. 딸이 느끼는 그 갈망이 어디로 향할지, 어떤 답을 찾아낼지, 그 여정을 함께 응원하고 싶다. 물론 빼꼼이의 산책 시간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겠지.
남편 왈, "슬기야, 나이 들어 몸이 힘드니 역마살도 줄어든다. 젊음은 축복이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