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전무가 선을 넘었다.
그날도 야근이었다.
새벽 1시, VIP 고객과의 마지막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전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나나 씨, 그 계약 건 내가 직접 마무리할게. 보고서만 올려놔.”
그 한 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번 건은 내 커리어의 정점이었다.
국내 상장사 회장의 자산 관리 계약,
보험·펀드·신탁을 묶은 100억 규모의 종합 포트폴리오 계약이었다.
한 달 넘게 달려왔다.
회장 비서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새벽에도 보고서를 수정했고,
시그니엘에서의 미팅 날엔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
그만큼 이번 계약은 내 ‘인생의 한 줄’을 바꿀 숫자였다.
다음 날 아침, 본사 메신저에 공지가 올라왔다.
“이번 분기 신규계약 100억 달성, 전무님 축하드립니다.”
순간, 화면 속 숫자가 눈에 꽂혔다.
100억.
그건 내 손으로 만든 결과였다.
그런데 내 이름은, 없었다.
“전무님, 보고서에 제 이름이 빠졌던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팀 전체 실적이지. 개인 이름을 굳이 넣을 필요 있나?”
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엔 묵직한 협박이 있었다.
‘조용히 있으면, 언젠가 네 차례가 오겠지.’
그날 밤,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다시 열어봤다.
내가 만든 제안서 위에, 그의 사인이 덧입혀져 있었다.
깔끔하게 지워진 내 이름.
그 자리에 새겨진 그의 서명.
내 노력이, 내 한 달이, 내 존재가
한 줄의 사인으로 지워졌다.
그날 밤, 전무가 선을 넘었다.
그는 나의 성과를 빼앗았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회사의 ‘성공’이란,
누군가의 피로 쌓은 거짓이라는 걸.
창밖으로 번지는 서울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나를 위해 싸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