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이름이 사라진 보고서

그날 밤, 전무가 선을 넘었다.

by 친절한기훈씨

그날도 야근이었다.

새벽 1시, VIP 고객과의 마지막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전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나나 씨, 그 계약 건 내가 직접 마무리할게. 보고서만 올려놔.”

그 한 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번 건은 내 커리어의 정점이었다.

국내 상장사 회장의 자산 관리 계약,

보험·펀드·신탁을 묶은 100억 규모의 종합 포트폴리오 계약이었다.

한 달 넘게 달려왔다.


회장 비서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새벽에도 보고서를 수정했고,

시그니엘에서의 미팅 날엔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

그만큼 이번 계약은 내 ‘인생의 한 줄’을 바꿀 숫자였다.

다음 날 아침, 본사 메신저에 공지가 올라왔다.


“이번 분기 신규계약 100억 달성, 전무님 축하드립니다.”

순간, 화면 속 숫자가 눈에 꽂혔다.

100억.

그건 내 손으로 만든 결과였다.

그런데 내 이름은, 없었다.

“전무님, 보고서에 제 이름이 빠졌던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팀 전체 실적이지. 개인 이름을 굳이 넣을 필요 있나?”


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엔 묵직한 협박이 있었다.

‘조용히 있으면, 언젠가 네 차례가 오겠지.’

그날 밤,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다시 열어봤다.

내가 만든 제안서 위에, 그의 사인이 덧입혀져 있었다.

깔끔하게 지워진 내 이름.

그 자리에 새겨진 그의 서명.

내 노력이, 내 한 달이, 내 존재가

한 줄의 사인으로 지워졌다.


그날 밤, 전무가 선을 넘었다.

그는 나의 성과를 빼앗았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회사의 ‘성공’이란,

누군가의 피로 쌓은 거짓이라는 걸.

창밖으로 번지는 서울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나를 위해 싸워야겠다.”

ChatGPT Image 2025년 10월 9일 오후 04_35_26.png


keyword
이전 06화전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오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