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자 버스 운전기사
통장 잔액: 1,247원.
휴대폰 화면을 끄고,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퇴직금도, 실업급여도 없었다. 전무의 죄가 내 이름으로 남아 있는 한, 나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다.
변호사 비용으로 2천만 원이 나갔고,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쓴 돈은 그보다 더 많았다. 결국 '무혐의'라는 결과를 받았지만, 내 통장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나야, 괜찮아?"
엄마의 전화였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1. 김나나 버스 핸들을 잡다
"버스기사 모집 – 경력 무관, 대형 면허 소지자"
구인광고를 본 건 우연이었다. 아니,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자격증을 따고 면접을 봤다. 면접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렇게 어른 여자분이 왜 버스기사를 하려고..?"
"돈 벌려고요."
솔직하게 말했다. 면접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부터 나와."
새벽 4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차고지에 도착하면 버스를 점검하고, 5시 30분 첫차를 출발시켰다. 핸들을 잡은 손은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졌다.
"기사님, 카드 안 찍혀요!"
"아줌마, 여기서 내려주세요!"
"왜 이렇게 천천히 가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리는 목소리들. 처음엔 화가 났지만, 점차 무뎌졌다. 그저 핸들을 잡고, 브레이크를 밟고, 손님을 태우고 내리는 일상이 반복됐다.
버스 운행은 오후 3시에 끝났다. 하지만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밤엔 배달 대리기사
오후 4시, 나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배달 대리기사.
음식점 사장님들이 직접 배달하기 힘들 때, 대신 배달을 해주는 일이었다. 한 건당 5천 원에서 1만 원.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20건 정도 했다.
"여기 치킨 두 마리요!"
"짜장면 세 개 배달이요!"
비 오는 날엔 더 바빴다. 헬멧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장갑은 젖어 손이 시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버스기사 월급: 280만 원.
배달 대리 월 수입: 400만 원.
합치면 680만 원. 월세 50만 원을 내고, 식비를 아껴 쓰면 한 달에 500만 원은 모을 수 있었다.
하루 18시간의 무게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밤 11시 30분에 집에 돌아왔다.
하루 18시간.
샤워하고 자면 새벽 1시. 그리고 다시 4시 30분에 알람이 울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통장 잔액이 쌓여가는 걸 보면, 견딜 수 있었다.
6개월 뒤
통장 잔액: 3,100만 원.
목표액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뭘 할까?
며칠 뒤, 나는 가락시장으로 향했다.
2. 트럭 한 대의 무게
"이걸로 뭐 하려고?"
중고 트럭 매매상 사장이 물었다. 나는 짐칸을 두드리며 말했다.
"장사요."
1톤 트럭 가격은 1,500만 원. 남은 돈으로 가락시장에서 과일을 떼올 수 있었다.
새벽 3시, 가락시장은 이미 불이 환했다. 경매가 시작되고, 나는 손을 들었다.
"사과 한 박스에 2만 원!"
"수박 열 통에 15만 원!"
처음엔 떨렸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언니, 처음이지? 이것부터 떼 가. 요즘 잘 나가."
딸기 다섯 박스를 실었다. 트럭을 몰고 시내로 나가,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 앞에 자리를 잡았다.
"딸기 한 팩에 만 원! 싱싱해요!"
목소리가 쉬었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한 명, 두 명씩 다가와 과일을 샀다.
하루 매출: 37만 원.
원가를 빼고 나면 12만 원 정도 남았다. 많지 않았지만, 이건 내 돈이었다.
3. 길거리에서 배운 것들
1년간 길거리 장사를 하며 배운 게 있다.
사람들은 싼 걸 사는 게 아니라, 믿을 만한 곳에서 산다는 것이다.
"아저씨, 여기 딸기 진짜 맛있어요. 저번에도 샀는데!"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얼굴로 장사하니 사람들이 기억했다.
"언니, 오늘 뭐 좋은 거 있어요?"
"오늘은 샤인머스캣! 가락에서 아침에 떼왔어요."
손님과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과일을 건넸다. 그 순간만큼은 전무도, 감사팀도, 보고서도 없었다.
하루 평균 매출: 80만 원.
한 달이면 2,400만 원. 원가와 기름값, 트럭 유지비를 빼면 손에 쥐는 돈은 900만 원 정도였다.
통장 잔액이 다시 쌓여갔다.
4. 깔세 가게, 그리고 월 3천
1년 뒤, 나는 작은 가게를 얻었다.
보증금 3,000만 원, 월세 300만 원.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10평짜리 과일 가게였다. 월세가 비쌌지만,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언니, 여기서 장사하네! 축하해요!"
단골 손님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길거리에서 보던 얼굴들이 이젠 가게 안에서 웃고 있었다.
냉장고를 들이고, 진열대를 정리하고, 간판을 달았다.
'나나네 과일가게'
간판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내 이름이 다시 돌아왔다.
가게를 연 지 6개월이 지났다.
오늘의 매출: 412만 원.
한 달 평균 매출은 1억 2천만 원을 넘겼고, 원가와 월세, 인건비를 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3,000만 원이었다.
이 돈은 많은 돈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돈은 내가 번 것이다.
밤 10시, 가게 셔터를 내렸다. 손은 거칠어졌고, 허리는 아팠다. 하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를 샀다. 빨대를 꽂고 한 모금 마셨다.
달았다.
다시 시작
사람들은 묻는다.
"지금 일에 만족하시나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전 지금이 좋아요."
추락은 끝이 아니었다. 그건 새로운 시작이었다.
예전에 나는 사라졌고, 버스 핸들을 잡고, 오토바이에 올라 골목을 누비고, 트럭을 몰고, 과일을 팔며 진짜 나를 찾았다.
다시 시작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선택한다.
새벽 3시, 가락시장으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
오늘도 좋은 과일을 고를 생각에, 나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 끝 -